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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 지역에서 전통시대에 부모를 효성으로 극진하게 섬긴 자녀. 효 사상은 삼국시대에 이미 전개되었다. 고구려에서는 태학(太學)에서 오경(五經)과 중국의 사서들을 교육하였고, 신라도 국학(國學)에서 『논어(論語)』와 『효경(孝經)』 등을 교육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여 유교 경전을 학습하고, 『논어』와 『효경』을 필수 과목으로 하여 유교적 충효 사상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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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효자. 권국화는 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하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내려온다. 한 번은 아버지의 병에 백약이 무효하여 탄식하다가 뒷산에 올라가니 뜻밖에 말 한 필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말이 꼬리를 치면서 어서 타라는 것 같아서 성큼 올라탔더니, 단숨에 장호원(長湖阮)의 약방 앞에 멈추었다. 말에서 내려 약방에 들어가 병 증세를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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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성시(性施), 호(號)는 농은(農隱), 증조부는 권종석(權鍾奭), 아버지는 권영목(權寧穆)이며, 어머니는 수원백씨(水原白氏)이다. 13세에 정덕영(鄭德永)의 딸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증조부 권종석의 유훈을 받아 남다르게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한 번도 거역한 일이 없었다. 모친 수원백씨의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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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安東).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 김환유(金煥維)의 아들이다. 김기화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느 날 글방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놀랍고 마음이 이상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중 호랑이가 나타나 이상한 물건을 놓고 사라졌다. 호랑이가 놓고 간 물건을 가지고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위독하여 가지고 온 물건을 달여 입에 흘려 넣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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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김상열의 차남으로 백부(伯父)인 김상우(金商禹)에게 입양되었다. 김달제는 백부인 양부모와 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는 동시에, 형이 일찍 죽고 고독하게 사는 형수 또한 어머니같이 극진히 대하였다. 그러던 중 형수가 우연히 병이나자 천지신명께 기도하니 형이 꿈속에 나타나 고생함을 위로하고 약을 알려주었다. 알려준 약제로 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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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유학자이자 효자.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노(聖魯), 호는 국사(菊史).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김문수(金文秀)이다. 김사구(金思逑)은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에게서 사사(師事)하였으며, 나이 70세에 노모가 살아 계셔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봉양하였다. 상을 당하여서는 산이 높고 험준한데도 팔순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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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김석룡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과 생극면 일부가 음죽현(陰竹縣)에 속하였을 때 상율면 본율동에 살던 양인(良人)이다. 김석룡은 아버지가 병환에 들자, 아버지의 병에 사람 고기가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허벅지 살을 도려내 삶아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였다. 김석룡의 부인 장씨 또한 시아버지의 병을 13년간이나 지극하게 간호하였다. 음죽현의 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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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김선은 평소 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당시 음성현(陰城縣)의 유림들이 그의 효행을 진정하여 관아에서 이 일을 기록하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통덕랑(通德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贈職)되었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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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여균(汝均), 호(號)는 정암(精菴). 평소 효심이 지극했던 김순은 아버지 상을 당하자 마을 뒷산에 모시고 추운 겨울에도 매일 시묘를 하여 손가락이 얼어서 일곱 개가 떨어져나갔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칠지효(七指孝)라 불렀다. 그가 아버지 묘에서 시묘하는데 밤에는 큰 범이 와서 같이 지냈으며, 낮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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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설암(雪巖). 김득수(金得洙)의 아들이다. 김예숙은 어느 날 김승선(金承宣)의 집에서 공부를 하던 중 갑자기 마음이 놀랍고 온몸에 땀이 나서 주위 사람들의 만류함을 무릅쓰고 급히 집에 돌아와보니,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여 온 집안이 겁에 질려 있었다. 그가 곧 손가락을 잘라 주혈(柱血)하자, 어머니는 회생하여 2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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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성진(聲振), 호(號)는 우헌(愚軒). 김낙영(金樂英)의 아들이다. 김정훈의 어머니인 계모 박씨(朴氏)는 성격이 엄하였으며 힘을 기울여 그를 공직(供職)하게 하였다. 그 결과 김정훈은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추운 겨울 어머니가 병이 나자 그는 눈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얻기 어려운 약초를 구하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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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의성(義城). 참봉(參奉) 김예숙(金禮淑)의 차남이다. 김태섭은 평소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아버지가 병환이 나서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하여 3일간을 더 살게 하였다. 돌아가신 후에 장례를 극진히 모시고 시묘(侍墓)를 할 때 밤마다 범이 와서 호위하고 다른 짐승이 오면 소리내어 꾸짖어, 비록 어두운 밤중이라도 범의 안광(眼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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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경성부 수하정보통학교의 소사로 있던 당시 26세 서대순(徐大順)의 협조를 얻어 배운성과 함께 1919년 4월부터 10월까지 은밀히 독립운동 목적을 기재한 문서를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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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字)는 군삼(君三), 호(號)는 송암(松巖). 첨정 민휘정(閔鰴鄭)의 아들이다. 민동량은 5세 때 글을 깨우쳐 주위에서 신동이라고 소문이 났으며 5~6세 때 부모가 병이 났을 때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 곁을 떠나지 않고 병을 간호하였다. 10세에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자 하늘에 기도하였고, 15세 때인 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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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원실(元實), 호는 한송(寒松). 민휘계(閔徽繼)의 5세손이다. 민정현(閔鼎顯)[1783~1812]은 3세에 글을 읽고 10세에 경서를 통달하였으며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七長寺)에서 노승과 같이 경서(經書)와 시부(詩賦)를 토론하는데 막힘이 없어 30여 명의 중들이 경탄하였다. 학식이 탁월하여 먼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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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된섬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민해준의 효행은 이 바위와 관련되어 전하고 있다. 민해준이 어머니와 같이 밭에서 김을 매다가 소낙비를 만났는데, 비를 피하기 위하여 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바위가 조금 움직이는 것 같더니 곧 굴러 내릴 위험에 있었다. 이 때 민해준은 어머니를 밖으로 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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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字)는 미윤(美胤), 호(號)는 호암(湖巖). 민홍로(閔弘魯)의 아들이다. 민휘계는 집안이 가난하여 낮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밤에는 경전(經典)을 읽으면서 생활하니 몸에 걸칠 옷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워 한 상에서 밥을 먹고 한 이불에서 자고 같이 글을 읽으면서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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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강지(綱之), 호는 유서(柳墅). 박경세(朴慶世)의 아들로 박응한(朴應漢)에게 입양되었다. 박래복은 양부모를 극진히 섬겨 충주 유림에 의해 효자로 추천되었다. 그는 효가문에 이름이 올라 아버지 박응한, 조부 박준흠, 증조부 박정규, 고조부 박진구, 현조부 박호원, 아들 박지혁까지 음성 인물에 등재되었다. 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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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의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음성(陰城). 자(字)는 성원(聲元), 호(號)는 만오(晩悟). 효자 박정규(朴廷珪)의 손자이고, 박준흠(朴俊欽)의 아들이다. 박응한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가 염병에 걸리자 하늘에 빌며 정성을 다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잉어를 얻어 봉양하여 어머니의 병을 고쳤다. 또 어머니의 비병(痹病)을 침으로 고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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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이자 효자. 본관은 음성(陰城). 자(字)는 헌지(獻之), 호(號)는 이락(二樂). 충민공 박순(朴淳)의 11세손이고, 효자 박호원(朴浩遠)의 손자이며, 동지중추부사 박진구(朴震龜)의 아들이다. 박정규는 후제 김간(金幹)에게 배우고, 1721년(경종 1)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선릉참봉(宣陵參奉)을 지내다가 아산현감(牙山縣監)에 이르렀다. 어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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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인이자 효자. 본관은 음성(陰城). 자(字)는 천경(天卿), 호(號)는 면헌(勉軒). 충민공(忠民公) 박순(朴淳)의 8대손이다. 박호원은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인(門人)이다. 문예(文藝)에 뛰어나고 필법이 정교했다. 1618년(광해군 16)에 창경궁이 중건(重建)되자 문 위에 거는 편액(扁額)을 썼다. 광해군은 이 글씨를 보고 가상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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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부모가 중병을 앓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드려 소생시키고 3일을 더 살게 하였다. 성필창의 효행이 알려져 복호(復戶)되어 조세·부역을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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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 때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 상산백(常山伯) 송인(宋仁)의 7세손이며, 평리(評理) 송소(宋玿)의 아들이다. 송광도는 벼슬이 정용랑장(精勇郞將)이었으며, 부모에 극진한 효성이 명황(明皇)에게까지 알려졌다. 송광도의 처(妻) 허씨(許氏) 또한 효부(孝婦)로 이름이 났다. 83세의 시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고 병이 나자 변(便)을 맛보며 증상을 살피면서 간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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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이장(而張). 아버지는 신상민(申尙閔)이고, 아들은 신명상(申命相)이다. 병석에 누운 아버지를 위하여 낚시하고 약초를 캐어 지성으로 병간호를 하였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눕자 아버지 병환 때와 마찬가지로 정성을 다하였다. 어머니가 위독하여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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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유학자.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사현(士賢), 호는 직당(直堂).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으로, 조부는 신태원(申泰元)이며, 아버지는 가정(稼亭) 신만균(申萬均)이다. 어머니는 함평이씨로 이설서(李卨緖)의 딸이다. 1869년(고종 6) 12월 8일 경기도 여주군 소곡리에서 출생하였다. 8세에 외종조 국포(菊圃) 이직서(李稷緖)에게 배웠으며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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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단양. 아버지는 중추부사(中樞府使) 우은정(禹殷鼎)이다. 홀어머니 경주이씨를 극진히 봉양하여 효자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머니가 일찍이 과부가 된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어머니에게 효를 다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이 들자 수년 동안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고, 죽은 뒤에는 3년 동안 시묘(侍墓)를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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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어머니가 병이 깊어지자 윤기손·윤기진 형제는 병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다. 한번은 어머니가 꿩고기를 원하자 형제가 꿩을 구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구할 수 없어 탄식하며 쏘다니던 중 우연히 독수리 한 마리가 꿩을 차고 오다가 형제 앞에 떨어뜨렸다. 형제는 이 꿩을 주어다가 어머니에게 고아 드렸는데, 이것을 먹고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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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어머니가 병으로 고생하자 윤기진과 형 윤기손(尹起巽)은 병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다. 한번은 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구할 길이 없자 탄식하며 울고 있는데, 우연히 독수리 한 마리가 꿩을 물고 오다가 형제 앞에 떨어뜨렸다. 형제가 그 꿩을 고아 드리자 어머니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어머니가 위독하자 형은 세 손가락을, 윤기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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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우봉. 청렴결백한 관리로 이름났던 이형(李涥)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이영(李榮), 아버지는 이광하(李光夏)이며, 아들은 이경선(李慶善)이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하늘에 대신 죽기를 기도하여 아버지의 병이 낫게 하였다. 고종 때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효행을 다하니 도에서 상계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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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우봉. 자는 백화(伯華). 청렴결백한 관리로 이름났던 이형(李涥)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이영(李榮)이고, 아들은 이경(李坰), 손자는 이경선(李慶善)이다. 부모가 병석에 눕자 부모의 변을 맛보아 가며 증세를 살폈고, 매일같이 하늘에 빌며 부모의 병이 낫기를 빌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생선을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갑자기 구할 도리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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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벽진. 자는 사업(四業). 충강공(忠剛公) 이상급(李尙伋)의 후손이고, 부인은 경주최씨이다. 집안은 가난하였으나 아버지의 입맛에 맞는 것은 무엇이든 정성껏 마련해 드렸고, 아버지가 위급할 때 쉬지 않고 수 십리를 달려가 약을 구해 와 아버지를 소생시켰다.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계모가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것을 부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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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벽진. 자는 중온(仲蘊). 증조부는 충강공(忠剛公) 이상급(李尙伋)이고, 아버지는 이지달(李志達)이다. 생후 몇 개월 만에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중에 자라서 추복(追服) 3년을 하였다.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모셨으며, 아버지가 병이 나자 변을 맛보며 간호하고 하늘에 빌었다. 상을 당하자 4일을 먹지 않고 석 달간 말하지 않았으며 3년간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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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이식후는 훈장 노릇을 하며 노부모를 봉양하였다. 하루는 제자들이 말하기를 ‘가르침에 너무 열중하다 보니 부모님의 봉양이 소홀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감복한 이식후는 더욱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가 병이 나면 하늘에 대신 죽기를 기도하였으며 변을 살펴 증세를 짐작한 후 탕약을 지었고, 부모가 위독할 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게 하여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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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단양. 자는 보도(普道), 호는 노포(老圃). 문헌공(文獻公) 장정필(張貞弼)의 후손이며 장석문(張錫文)의 아들이다. 장덕우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으며 형제와 이웃 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실천함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며 눈물을 흘리니 그 눈물이 마르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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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단양(丹陽). 자(字)는 성첨(聖瞻), 호(號)는 향초(香樵). 충신 장충범(張忠範)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장덕우(張悳雨)이다. 장동노는 항상 경로정신이 두터워 부친이 생존시에는 술과 고기를 항상 장만하여 드렸고, 이웃 어른과 노인을 정중히 모셔 부친의 뜻을 기쁘게 하여 드렸다.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서도 자신이 늙어서 몸과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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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 호는 포음(圃蔭). 조선개국일등공신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장사길(張思吉)의 후손이다. 헌종(憲宗) 때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에서 출생하였다. 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장지를 정할 때, 장지에 관한 송사(訟事)가 발생하자 장상기가 울며 관가에 호소하니 그 정성에 감복하여 장지 쓰는 것이 허가되었다. 장례를 지낼 때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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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단양. 자는 자류(子類), 호는 금리(琴里). 충신 장충범(張忠範)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장택한(張宅漢)이고,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이다. 글을 잘 지어 문행(文行)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끊어서 피를 들게 하여 소생시켰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시묘를 하는데 커다란 범 한 마리가 매일같이 찾아와 같이 지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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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제용(齊用).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장사길(張思吉)의 후손이며, 동몽교관(童蒙敎官) 장상기(張相基)의 손자이다. 장제천은 어려서부터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어머니를 위하여 항상 맛 좋은 음식을 준비하고 특별한 음식이 생기면 어머니께 제일 먼저 갖다 드렸다. 모친의 병환이 몹시 위중함에 하늘에 빌며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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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 자는 공제(公濟). 아버지는 호조참판 정윤공(鄭輪公)이다. 정국노의 5형제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을 5효촌이라 하였다. 정국노는 원래 집안이 가난하여 스스로 산에서 나물을 캐고 식량을 구하여 백여 리 길을 다니기를 거듭하였다. 새벽마다 아버지께 문안을 올렸는데 혹시 조금이라도 마음이 유쾌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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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공거(公擧). 정창(鄭昌)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호조참판 정윤공(鄭輪公)이다. 그의 셋째 아들로, 형으로는 정국주(鄭國柱)와 정국추(鄭國樞)가 있으며, 동생으로는 정국노(鄭國櫓)와 정국빈(鄭國彬)이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하던 중, 임진왜란을 당하여 마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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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 자는 공간(公幹). 정창(鄭昌)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호조참판 정윤공(鄭輪公)이다. 그의 막내아들로, 형으로는 정국주(鄭國柱), 정국추(鄭國樞), 정국량(鄭國樑), 정국노(鄭國櫓)가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천성이 효성스럽고 인품이 맑고 높았다.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가 출중하여 무과에 합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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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충신이자 효자. 예로부터 효자 가문에서 충신이 난다고 하였으니, 정국주는 나라가 위급하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충성을 바쳤으므로 그 효와 충이 아울러 장하다고 칭송을 받았다. 본관은 초계. 정창(鄭昌)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호조참판 정윤공(鄭輪公)이다. 그의 맏아들로, 동생으로는 정국추(鄭國樞), 정국량(鄭國樑), 정국노(鄭國櫓), 정국빈(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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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공두(公斗). 정창(鄭昌)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호조참판 정윤공(鄭輪公)이다. 5형제 중 둘째로 형이 정국주(鄭國柱)이며, 동생으로는 정국량(鄭國樑), 정국노(鄭國櫓), 정국빈(鄭國彬)이 있다. 정국추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형과 아우들에게 우애와 정이 두터워 화목하였고, 충성과 의리 또한 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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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 자는 명여(命汝), 호는 일옥(一玉). 홍문공 정배걸(鄭倍傑)의 29세손이며 교리 정창(鄭昌)의 15세손이다. 아버지는 감역(監役) 정효선(鄭孝善), 어머니는 안동김씨이며, 부인은 양천허씨이다. 아들은 효자로 이름난 정인상(鄭寅尙)이다. 정규영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서울에서 지내던 중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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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도숙(度叔). 교리 정창(鄭昌)의 13세손이고, 아버지는 동몽교관(童蒙敎官) 정석휴(鄭錫休)이다. 1746년(영조 22)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에서 출생하였다. 오효자로 이름난 정국주(鄭國柱)의 후예답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에도 뛰어나 경학에 덕망이 높았으나 과거를 보아 출세하면 부모를 봉양하기 어려움을 깨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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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 자는 주노(周老), 호는 위은(渭隱). 아버지는 효자 정규영(鄭圭永)이고,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이며, 부인은 효부로 이름난 현풍곽씨이다. 1906년(고종 43) 현풍곽씨와 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었던 정인상은 새로운 음식이 생기면 먼저 부모에게 드렸으며,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문안을 하였다. 8대에 걸친 조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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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유림지도자. 위은(渭隱) 정인상(鄭寅尙)의 맏아들로 자는 성윤(聖倫), 호는 구봉(九奉)이다. 정조헌은 재주가 뛰어나고 영특하여 3세 때 천자문(千字文)을 통달하고 20세까지 도장제(道莊齊)에서 한학(漢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 후 가사에 종사하면서 마을 이장직을 23년간 맡아 주민복지에 헌신하였으며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30여 년 동안 연말마다 전국 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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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경여(敬汝), 호는 유헌(柳軒). 문정공(文貞公) 조무(趙廡)의 후손이며, 효자 조용하(趙用夏)의 아들이다. 아들은 조헌용(趙憲瑢), 조헌영(趙憲瑛), 조헌옥(趙憲玉) 3명을 두었다. 부친 조용하가 병에 걸리어 위중하게 되자 조기순이 밤중에 맑은 물을 길어다가 백일 동안 탕약 물로 사용하였더니 병에 효험이 있어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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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순창. 자는 윤집(允執). 문정공(文貞公) 조무(趙廡)의 후손이고, 부인은 평택임씨(平澤林氏)이다. 조용하는 아버지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수혈하여 아버지를 소생시켰다. 부인 임씨는 남편이 위독하자 두 차례나 손가락을 끊어 수혈하여 남편을 소생시켰다. 1888년(고종 25) 임금이 조용하에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증직하고 조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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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한양. 자는 탁이(卓爾), 호는 삼외옹(三畏翁). 아버지는 조변(趙卞)이다. 1605년(선조 38)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 가평(가래들)에서 출생하였다. 황실해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성품이 온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향을 피우고 아버지 대신 죽기를 하늘에 빌었으며, 대변을 맛보아 가며 아버지를 정성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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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주백(周伯). 사과 최두수(崔斗壽)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동중추 최덕립(崔德立)이다. 아버지는 서부참봉 최기선(崔起先), 어머니는 진천임씨(鎭川林氏)로 임대성(林大誠)의 딸인데, 외할아버지는 판관 임수무(林秀茂)이다. 부인은 안동권씨로 권서(權澨)의 딸인데 자식 하나를 두었으며, 부인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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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죽정(竹亭) 선생의 후손으로 부인은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1813년(순조 13)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에서 출생하였다. 1826년(순조 26) 아버지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니 마을 사람들이 효자라 칭송하였다. 1839년(헌종 5) 남원양씨와 혼인하였는데, 부인 또한 효부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부인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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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 지역에서 전통시대에 목숨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남편을 위해 지극한 정성을 다한 부녀자. 열녀란 위난을 당하여 목숨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또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난과 싸우며 수절한 부녀자로 일반적으로 열녀와 열부(烈婦)를 통칭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충효열 관념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는 형태로 정치적·사회적 규범으로 체계화되면서 열녀는 사회적인 중요성을 강화해갔다.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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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수절한 열녀. 박호식(朴鎬植)의 딸이며 본관은 밀양이고 죽산에서 태어났다. 18세에 출가하여 시부모를 극진하게 봉양하여 집안을 화목하게 만들었다. 남편 강진영(姜鎭榮)이 일찍 병을 얻으니 약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여 1년을 연명하게 했으나 끝내 죽었다. 이때 나이 스무 살인 박씨는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어린 아들이 있어 죽지 못하고 대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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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효부. 구덕자의 처 조씨는 출가한 지 2년 만에 남편이 죽었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시어머니를 평생 봉양하니 음성향교(陰城鄕校)에서 표창하였다. 사림에서 효열비(孝烈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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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진주(晋州). 권종원(權鐘源)의 처이다. 권종원의 처 진주정씨는 시부모님을 봉양함에 효성을 다하였고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였다. 조선 후기 고종 때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열녀 정문(旌門)을 세웠다. 현판에는 ‘열녀학생권종원처유인진주정씨지문(烈女學生權鐘源妻孺人晋州鄭氏之門)’이라고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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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효부(孝婦). 본관은 평강(平康). 전규면(全奎冕)의 딸이며, 김동인(金東仁)의 처이다. 김동인의 처 평강전씨는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정숙하고 심성이 인자하여 부모님 섬기는 도리를 다하였다. 또 언행이 바르고, 비록 부잣집에서 성장하였으나 사치함을 모르고 검소하였다. 17세에 김동인에게 출가(出嫁)하였는데, 늘 살림이 가난하여 양식 걱정을 면치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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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부. 김석룡 처 장씨는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던 양인(良人) 김석룡의 처로, 젖을 짜서 병든 시아버지를 시중하는 등 13년간이나 효행을 행하였다. 김석룡 또한 아버지 병에 허벅지 살을 도려내 삶아드리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유림(儒林)들이 장씨의 효행을 진정하여 장계(狀啓)를 올리니 1720년(숙종 46) 5월에 복호(復戶)를 명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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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우봉(牛峯). 이호건(李鎬建)의 딸이고, 김석제(金錫濟)의 처이다. 16세에 김석제에게 시집가서 부모와 남편을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결혼한 지 8개월 만인 17세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마친 후에 부모님들이 청춘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재혼하기를 권유하였으나, 거절하고 남편을 따라 자결하고자 하였다. 시부모님의 만류에 뜻을 이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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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성주(星州).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이휘(李揮)의 딸이고, 김선경(金善慶)의 처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으로 있던 남편 김선경은 싸움터로 나가고 자녀들만 데리고 집에 있었다. 충주 전투에서 이긴 왜적이 음성 지방까지 들어오자, 부인은 생극면 차곡리에 있는 수리산(愁離山)으로 피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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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김용대(金容大)의 처 의성김씨는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에서 김상빈(金相彬)의 딸로 태어나 19세에 결혼하여 음성군 생극면에서 살았다. 홀로된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모시고 남편을 공경하였다. 23세 때 남편이 병환으로 사망한 뒤에도 늙은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며 5대 독자인 당시 두 살의 아들을 키워냈다. 노환의 시어머니에게 도리를 다하여 간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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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나주(羅州). 아버지는 정약임(丁若臨)이다. 정씨의 정확한 거주지나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남편에 대한 정절과 시부모에 대한 효행으로 잘 알려져 있다. 16세 때 남편이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지혈(指血)하여 3일을 연명케 하였으나 끝내 죽었다. 이에 남편을 따라 같이 죽으려 하였으나 늙은 시부모 때문에 그리하지 못하고, 정성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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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전의(全義). 이군순(李郡淳)의 딸이다. 남편이 일찍 죽자 70세가 넘은 시어머니와 8개월 된 어린 자녀를 정성으로 보살폈다. 낮에는 김을 매고 밤에는 길쌈을 하면서 일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자식을 길러서 가문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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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청주(淸州). 고형진(高亨鎭)의 딸이고, 남석기(南錫驥)의 처이다. 고씨는 나이 17세에 시집을 갔으나 수개월 만에 남편이 병이 나고 시어머니도 병이 들었다. 손가락을 끊어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차례로 피를 먹여 소생하게 하였다. 얼마 후 남편이 사망하자 장도를 품고 평생을 수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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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이자 효부. 박도연(朴道淵)의 처(妻)이다. 교생(校生) 박도연의 처 이씨(李氏)는 시부모 공양에 극진하여 효부로서 칭찬이 자자했다. 어느 해 봄에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박도연의 집까지 옮겨 붙었다. 때마침 농사철이라 마을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불이 난 것을 본 이씨는 사당(祠堂)에 들어가 우선 신주(神主)를 가져오고, 이어서 방에 들어가 시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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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장흥(長興). 고려시대 대사헌(大司憲) 임헌의 딸이며, 박순(朴淳)의 처이다. 1402년(태종 2) 함흥차사로 함주(咸州)로 내려간 남편 박순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매일 목욕재개하고 하늘에 기원하였으나, 끝내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태종은 이 소식을 듣고 임씨의 묘지를 하사(下賜)하였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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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문화유씨 유철모(柳喆謨)의 딸로, 충민공 박순의 12세 손인 박장흠(朴長欽)과 혼인하였다. 아들이 없어 박양흠(朴亮欽)의 둘째 아들 박성한(朴聲漢)이 입계하였다. 박성한이 문행이 있어 벼슬이 헌납에 이르렀다. 문화유씨는 열행(烈行)이 있어 1794년(정조 18) 정려가 내려졌다.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 세워졌던 정려문은 소실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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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안동(安東). 김상하(金相夏)의 딸이고, 서효순(徐孝淳) 처이다. 남편 서효순이 일찍 죽자 부인 안동김씨는 장례를 잘 치른 후 시부모를 위로하고 저녁에 침실로 들어가 목매달아 죽었다. 모두가 경탄하였으며 열녀로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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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안동(安東). 성인하(成仁夏)의 처이다. 남편 성인하가 죽자 정절(貞節)을 지켰다. 1909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에 높이 210㎝의 비석을 세우고, 전면에 ‘성인하부인권씨정열비(成仁夏夫人權氏貞烈碑)’라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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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살았던 효부. 본관은 밀양(密陽). 박씨는 계모 슬하에서 자라다가 14세에 출가하였으나 26세에 남편을 잃었다. 가난한 집의 과부가 되어 많은 시집 식구를 봉양하느라 크게 고생하였다. 친정에서는 개가하기를 권유하였으나 이를 물리치고, 유복 아이를 길러서 은진송씨(恩津宋氏) 가문에서 일생을 마친다는 뜻에 따라 어려움을 참고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송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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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효부. 본관은 하음(河陰). 죽계(竹溪) 봉시중(奉時中)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봉일한(奉一漢)이다. 30살 때 남편을 잃고 83세의 시어머니를 정성으로 섬겼다. 시어머니가 병이 나자 변(便)을 맛보며 증상을 살피고 단을 쌓고 하늘에 7일간 기도하니, 시어머니의 꿈에 효부의 정성으로 10년은 더 산다고 하였다. 과연 시어머니가 93세까지 살다가 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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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효부이자 열녀. 이광빈(李光彬)의 딸로, 일찍이 남편을 여의었으나 재실(齋室)을 정성으로 지키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폈으며, 조카로 하여금 가문을 잇게 하여 효부·열녀로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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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전주. 아버지는 이해상(李海相)이다. 24세 때 남편이 병이 들자 입에 피를 흘려 넣기 위하여 손가락을 자르려 하였으나 칼이 없어 돌로 찍고 이로 물어뜯어 피를 흘려 넣어 소생시키고 3개월을 더 살게 하였다. 어린 아들을 잘 길러서 집안을 바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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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김언희(金彦熙)의 딸로, 19세에 남편 윤득성(尹得聖)이 병을 얻자 정성껏 간호하였다.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 천지신명께 남편 대신 죽기를 빌었으나 끝내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상을 마친 후 독약을 먹고 자결하려 하였으나 집안사람에게 발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유복자로 딸을 낳은 후 음식에 입을 대지 않다가 이틀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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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순흥. 남편은 이경립(李敬立)이고, 아들 이상현을 두었다. 유복자였던 이상현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학문에 정진하여 공조참의가 되어 그 덕망이 널리 알려졌다. 순흥안씨는 22세 때 남편을 여의고 삼년상을 치른 후, 어린 아들에게 “나는 이 시간에 네 아비를 따라 가겠노라”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라에서 열녀 정문을 세우게 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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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30세에 남편을 잃은 후, 2남 1녀를 이웃에 맡기고 밤을 새워 길쌈을 하여 끼니를 연명하였다. 시어머니와 같이 살지는 않았으나 정성껏 시어머니를 모셨고, 평생 수절하며 집안을 다스려 주위의 귀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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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진안대군(鎭安大君) 이방우(李芳雨)의 후손으로, 18세에 남곡(南谷) 17세손인 이석주(李錫柱)와 혼인하였다. 1년 만에 남편이 죽자 따라서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남편 전처의 소생인 어린 아들 환승을 보살피며 가문을 지킬 것을 이미 약조한 뒤였다. 남편의 유의(遺意)에 따라 종족(宗族)을 찾아서 위문(慰問)하니 모두들 감복하였다. 또한, 집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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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살았던 열녀이자 효부. 김봉학(金鳳鶴)의 딸로, 16세에 장동민(張東旼)과 혼인하였으나 얼마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90세 가까운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시부모가 돌아가시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조카를 데려다 가문을 이었다. 군(郡)에서 그 효열(孝烈)을 포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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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청주. 아버지는 이정주(李鼎周)이고, 남편은 장석영(張錫永)의 손자인 장동엽(張東曄)이다. 청주에 거주하는 시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하였다. 26세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세수하지 않고 의복도 갈아입지 않았으며, 머리도 빗지 않고 음식은 죽만 먹었다. 삼년상이 끝난 후 세수하고 의복을 재개하고 머리를 빗고,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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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장수. 남편은 장택한(張宅漢)이고, 아들은 장석영(張錫永)이다. 시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시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마을 뒤에 있던 샘터에서 매일 샘물로 목욕재계하고 3개월 동안 치성을 드리니 시아버지의 병이 완쾌되었다. 1856년(철종 7)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 만동묘(萬東廟)에 효부로 표창되었다. 1858년(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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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광주(廣州). 내사령(內史令) 이자성(李自成)의 후손인 이장회(李章會)의 셋째 딸이다. 전재학(全載學) 처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4세의 어린 나이에 전재학에게 출가(出嫁)하였다. 광주이씨는 남편이 병석에 눕게 되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나, 남편은 19세에 사망하였다. 이때 나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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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의 효부. 전의묵(全義黙)의 딸로, 시집오던 날부터 늙은 시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정성껏 간호를 하였다. 시집온 지 얼마 후 남편 정명환(鄭明煥)을 여의였으나 슬픔을 견디고 시어머니를 보살피며 살림을 꾸려 나갔다. 돌아가신 후에도 예법대로 상례를 행하여 마을에서 그 효와 절개를 포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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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부. 곽대용(郭大鎔)의 딸로,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고 우애가 돈독하였다. 1906년(고종 43) 정인상(鄭寅尙)과 혼인하였다. 시부모를 섬김에 극진히 하였는데, 시아버지인 정규영(鄭圭永)이 일찍부터 약주를 좋아하니 넉넉지 않은 집안 살림에도 하루에 세 번씩 약주를 대접하였다. 흉년이 들어 술을 빚을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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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부. 본관은 동래. 아버지는 정형조(鄭亨朝)이다. 일찍이 남편이 죽고 반나절을 기절하였으나 시부모가 살아 있음을 알고 일어나 효를 다하였다. 시부모가 죽은 뒤 장례를 마치고는 “내 할 일을 다 하였으니 살아서 무엇 하랴, 지아비를 따라가겠노라.”하고 탄식하며 죽으니 동리에서 효부로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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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자선 사업가. 조륵(趙玏)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에서 출생하였다. 조륵이 재산을 모은 일과 관련하여 음성 지역과 충주 지역에는 많은 일화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자린고비라 하여 구두쇠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지만 실은 자선 사업가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씀이 바람직할 것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선조 때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낸 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