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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2317
한자 六二五戰爭最初-勝戰地-無極戰跡國民觀光地
영어의미역 Mugeuk Battlefield Site, where the ROK forces took their first victory in the Korean War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산 1-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기범

[개설]

무극전적국민관광지는 1950년 7월 4일 음성군 음성읍감우재부용산, 동락리 일대에서 국군 제6사단 7연대와 제1사단 11연대가 5일 동안의 전투 끝에 북한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국민 관광 단지이다. 1986년에 조성하였는데, 18,479㎡의 면적에 감우재전승기념관과 음성 감우재전승기념비·충혼탑·감우재전승기념탑·음성타임캡슐2000·월남참전기념탑 등이 건립되어 있어 연간 약 5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가고 있다. 음성읍에서 장호원읍 쪽으로 6㎞ 정도 떨어져 있다.

감우재 전투라고도 하는 음성지구 전투는 6·25전쟁 당시 국군이 최초로 승리를 거둔 싸움이기도 하다. 음성지구 전투의 가장 큰 의의는 전쟁 발발 후 잇따른 패배에 따른 국군의 전열을 정비하고 사기를 회복하게 하여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성공적인 지연전을 수행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었던 기초가 되었다는 점이다.

[6·25전쟁의 첫 승리지, 음성지구]

충청북도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음성은 군청소재지로서 지방 행정 및 교통의 중심지이다. 6·25전쟁 발발 후인 1950년 7월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 지연시킨 국군 제1군단의 수도사단과 제1사단, 제2사단의 작전 지역은 충청북도 진천과 음성, 청주, 괴산, 미원 일대였다. 이들 지역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중간에 놓여 있는 지역으로 표고가 400~800m 정도의 높은 산과 계곡이 많으며, 기복이 심하고 삼림이 울창한 곳이다. 또한 저지대는 논·밭이 산재해 있고, 표고 100~200m의 구릉지대로서 기복이 완만하고 도로망이 발달되어 있다. 음성 지역 내의 주요 감제고지(瞰制高地), 곧 적의 활동을 살피기에 적합하도록 주변이 두루 내려다보이는 고지로 활용된 지역은 가섭산[710m]과 부용산[644m], 큰산[510m], 금봉산[482m] 등으로 음성지구 전투의 무대이기도 하였다.

[음성지구 전투의 배경]

국군은 북한군이 남침을 시작한 지 4일 만인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빼앗기자 한강의 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의 지휘 아래 한강선을 방어하였으나 결국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지 못하고 7월 3일 수원 방향으로 철수을 하는 데 수도사단과 제1사단, 제2사단, 제5사단, 제7사단 등이었다. 육군본부는 7월 5일자로 이 부대들을 수도사단과 제1사단, 제2사단 등 3개 사단으로 통폐합하는 동시에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모체로 제1군단 사령부를 창설하여 중서부 지방인 진천과 음성 지역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 후 미국의 지상군이 투입됨에 따라 경부국도를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은 미군이 담당하고, 중부 및 동부 지역은 한국군이 담당한다는 한·미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수도사단은 진천에 투입되고, 제1사단은 음성, 제2사단은 제1군단의 예비로서 증평에 집결시킴으로써 한·미 간에 전선이 조정되었다. 음성지구 방어를 담당하게 된 제1사단은 7월 7일에 증평에 도착하고, 8일에는 제6사단 제7연대로부터 음성 방어 임무를 인수받았다.

[제7연대의 음성지구 전투 전개 상황]

중동부 및 동부전선을 담당한 북한군 제2군단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춘천과 홍천을 점령한다. 그리고 제2사단을 가평과 이천 방향으로 보내고, 제12사단을 홍천과 원주 방향으로 보낸 뒤, 군단 예비로 있던 제15사단을 원주·장호원 방향으로 진출시켰다. 당시 북한군 제15사단은 1950년 3월 회령에서 중공군 출신으로 구성된 3개 대대와 민청훈련소 3개 지대를 통합하여 창설된 부대로서 1만여 명의 병력과 장갑차 20대, 122㎜ 곡사포 12문, 76㎜ 곡사포 28문, 45㎜ 대전차포 36문, 120㎜ 박격포 18문, 82㎜ 박격포 88문, 사이드카 30대 등을 장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7월 3일 장호원에 도착한 제15사단은 다음날 음성 방향으로 남하를 시작하였다.

7월 3일 밤 충주에 있던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장호원에서 철수한 사단헌병대와 강원도 경찰로부터 ‘북한군이 장호원에 침입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적이 이천과 충주 중간에 있는 장호원에 침입하였다는 것은 사단이 곧 양분될 위기에 있음을 의미했으므로 사단장인 대령 김종오는 제7연대를 장호원에 투입하기로 결심하고 제7연대장에게 ‘장호원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7연대는 임부택 중령의 명령에 따라 출동 준비를 서둘렀는데, 출동에 앞서 확인된 병력은 장교 88명, 사병 1,626명으로서 부상자 등 환자를 제외하면 소총 중대는 대체로 장교 2~3명, 사병 90명 내외였다. 연대의 주요 장비는 지원부대인 제16포병대대 제2중대의 105㎜ 곡사포 5문과 연대의 57㎜ 대전차포 4문, 대대의 81㎜ 박격포 12문, 중대의 60㎜ 박격포 17문, 구경 50 기관총 10정, 기관총 26정 등이었다.

7월 4일 09:00 충주중학교를 출발한 제2대대(대대장 김종수 소령)는 첨병 소대인 제5중대 제1소대로 하여금 적정을 탐색하다 동락리 교량 부근에서 북한군의 기동정찰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첨병 소대는 즉각 사이드카와 장갑차로 구성된 적 기동정찰대와 교전에 들어갔으나 화력의 열세로 차량 1대를 방치한 채 뒤로 물러섰다. 첨병 소대가 교전하자 뒤따르던 제5중대(중대장 최익영 중위)가 즉각 하차하여 전투 전개를 하면서 박격표로 적의 정찰대를 공격하였다.

결국 북한군은 장갑차 1대와 사이드카 2대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북한군의 장비뿐만 아니라 빼앗겼던 차량 1대를 되찾은 제5중대는 사기가 충천하여 도주하는 적을 뒤쫓아갔으나 신니면 모도원에서 약 1개 대대 규모의 적이 나타나자 추격을 중단하였다. 제2대대는 병력을 철수시켜 저녁때에는 신덕저수지(용원저수지)에 연계하여 진지를 점령하였다. 이날 잡힌 포로(장교)의 진술에 의하면, 장호원에 진출한 북한군 제15사단은 음성 점령을 기도하고 있으며, 동락리로 진출한 부대는 북한군의 제15사단 예하 제48연대이고 제49연대는 무극리로 향했다는 것이었다.

정보에 따라 이날 밤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음성 방어가 긴급하다고 판단하여 무극리·음성 축선에 연대 주력을 투입하기로 결심하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첫째, 제1대대는 7월 5일 08:00 충주를 출발, 음성으로 이동하여 무극리를 공격, 점령하라. 그리고 장호원을 공격하라. 둘째, 제2대대는 제3대대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음성으로 이동하여 제1대대의 공격을 지원, 장호원을 공격하라. 셋째, 제3대대는 7월 5일 08:00 충주를 출발, 제2대대 진지를 인수하고 생극을 공격, 점령하라.

이에 제1대대(대대장 김용배 소령)는 7월 5일 08:00에 충주를 출발, 음성으로 이동하여 무극리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제2대대(대대장 김종수 소령)는 제3대대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음성으로 이동, 사정고개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또 제3대대(대대장 이남호 소령)는 08:00 충주를 출발하여 제2대대 진지를 인수한 후, 생극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이처럼 3개 대대가 모두 음성 지역에 자리를 잡자 제7연대장은 연대본부를 충주에서 음성으로 이동하였다. 음성으로 이동한 제7연대장은 음성에서 북쪽으로 4㎞ 지점의 감제고지인 가섭산에 춘천경찰서장 조규홍 총경이 지휘하는 1개 중대 규모의 전투경찰대를 배치하여 능선 접근로에 대비하였다. 한편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도 예하의 3개 연대가 각각 진천, 음성, 충주에 전개함에 따라 지휘를 원활히 하기 위하여 사단 사령부를 충주에서 증평으로 이동하였다.

[무극리를 점령하라!]

무극리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1대대는 제3중대(중대장 김명익 중위)를 선두로 13:00부터 음성에서 무극리 방향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제3중대가 299고지 남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첨병 소대인 제3소대(소대장 이상우 중위)는 소여리를 지나 기름고개(유현)로 접어들 즈음 고개를 넘어오고 있던 일단의 무리를 발견하였다. 제3소대 소대장은 재빨리 병력을 도로 가에 산개한 뒤 은폐시켰다. 무리는 1개 소대 규모의 병력으로서 전투모를 쓰고 배낭을 짊어지고 있는 북한군이었다. 그 뒤에는 좀더 많은 병력이 따르고 있었다.

제3소대 소대장은 적의 규모가 1개 중대 이상인 것을 중대장에게 알리고 급히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잠시 후 적의 첨병 소대가 제3중대 제3소대가 은폐하고 있는 지역에 진입하자, 제3소대 소대장의 사격 명령과 동시에 일제 사격이 실시되었고, 적은 제대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무참히 쓰러졌다. 일부 병력은 오던 길을 되돌아서 도주하였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죽어 넘어졌다. 이리하여 기름고개에서의 조우전은 교전 15분 만에 제3중대 제3소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한편, 제3중대 중대장이 첨병 소대의 교전 소식에 전투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차에 제3소대장이 보낸 연락병이 당도하였다. 제3소대의 상황을 알게 된 중대장은 60㎜ 박격포를 기름고개 너머로 사격을 하도록 하면서 제2소대를 이끌고 기름고개로 달려갔다. 제3중대장이 현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다. 제3소대는 제2소대의 엄호 하에 현장을 수색, 2대의 자전거를 비롯하여 30여 정의 소총과 40여 구의 시체, 1명의 민간인 부상자를 확인하였다. 이 민간인은 “장호원에서 북한군에게 징집되어 탄약 운반 겸 길을 안내하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앞장섰다.”고 말하였다. 이때 적의 본대인 약 1개 대대 병력이 기름고개 북서쪽인 보현산에서 북쪽 1.5㎞의 지점의 430고지에 진지를 전개하여 차후 작전에 대비하는 듯하였다. 제3중대장은 이러한 상황을 대대에 보고하고, 기름고개 북동쪽의 385고지에 진지를 마련하였다.

기름고개에서의 전투가 끝나고 약 3시간 뒤, 385고지 일대에 전개한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연대를 지원하고 있던 제16포병대대 제2중대(중대장 이만호 대위)의 105㎜ 곡사포 5문의 지원을 받으면서 제2중대(중대장 오윤석 중위)를 왼편으로, 제1중대(중대장 이대웅 중위)를 오른편으로 하여 고개 북서쪽의 430고지를 공격하였다.

제1대대가 공격을 개시하자 적은 전투 준비가 미흡했던지 완강한 저항을 하지 않고 무극리 방향으로 물러섰다. 이에 제1대대는 이들을 추격하였으나 적이 250고지에서 완강히 저항하자, 우선 351고지와 310고지에 진지를 마련하였다. 이날 밤 제1대대는 351고지와 310고지 선에 배치되고 제2대대는 음성읍 감우리 사정고개음성읍 용산리 숫고개에 배치되었다.

다음날인 7월 6일 05:00, 제1대대는 제16포병대대 제2중대와 대전차포중대(중대장 박철원 중위)의 57㎜ 대전차포 4문의 지원을 받아 공격을 재개하였다. 적은 250고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제1대대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무극리 북방으로 철수하였다. 이리하여 제1대대는 11:00경 무극리를 점령하고, 북방 2㎞의 154고지와 328고지에 진지를 구축하여 적의 역습에 대비하였다.

무극리를 빼앗긴 북한군은 3시간 후인 14:00경 강력한 화력의 지원을 업고 우세한 병력으로 역습을 감행하였다. 154고지의 제3중대는 적에게 포위되어 악전고투하다 겨우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였으며, 328고지의 제2중대도 우세한 적에게 밀리어 물러나야 했다.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한 제1대대는 결국 154고지와 328고지 선에서 물러나 무극리 남동쪽 2㎞의 290고지·310고지 선에 진지를 점령하여 507번 도로를 통제하며 적의 진출을 저지하였다.

제7연대장은 14:00에 시작된 북한군의 공세로 제1대대가 진지를 지탱하기 어렵게 되자, 사정고개에서 읍성읍 사정리 안말에 진출해 있던 제2대대를 부용산에 배치하여 능선 접근로를 통제하도록 하였다. 또한 동락리에서 생극으로 진출하려던 제3대대가 철수하여 공백 지대가 된 동락리 일대의 적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한편,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무극리에서 전투가 가열되자 이천에서 죽산을 경유, 진천으로 철수한 제19연대장 민병권 대령에게 ‘제7연대를 지원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제19연대 제2대대(대대장 김용기 소령)는 무극리 남방 2㎞의 금왕읍 용계리 오룡골·310고지 선에 긴급히 투입되어 593번 도로를 통제하면서 이 선에서 적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제7연대 제1대대와 제19연대 제2대대는 무극리 남동쪽과 남쪽에서 연결된 진지를 형성하고 적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이 방어진지를 7월 8일까지 지탱하였다.

1. 동락리 기습전

제2대대로부터 진지를 인수한 제3대대(대대장 이남호 소령)는 7월 5일 13:00부터 생극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전진하고 있었다. 그에 앞서 중원군 신니면 문락리의 동락을 통과하고 있던 첨병 소대는 사이드카를 선두로 한 1개 중대의 적군이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고 즉각 본대에 경고하였다. 이에 제9중대(중대장 정재갑 중위)와 제11중대(중대장 인성훈 대위)는 긴급히 도로 변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일제 사격을 가하였다. 기습공격을 받은 북한군이 당황하여 도주하기 시작하자 제9중대와 제11중대는 233고지 부근까지 적을 추격하였으나, 북한군이 생극에서 대부대와 합류하여 반격을 펴자 곧 철수하여 동락리 좌·우측 1㎞에 있는 대화리·427고지 선에서 적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17:00경 북한군 1개 중대 규모의 기마병력이 모도원에서 대화리로 향하며 제3대대를 포위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제3대대장 이남호 소령은 적에게 포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대대장 독단으로 철수를 결심하였다. 이에 대대 주력은 제9중대의 엄호 하에 동락리 일대에서 차량에 탑승하여 철수하였고, 제9중대도 어둠을 이용하여 철수하였다. 그렇게 제3대대는 야음을 이용하여 철수를 계속하여 자정 무렵에는 신양리 삼거리 전방 2㎞인 유천 진지를 점령하였다가 다음날인 7월 6일 아침 290고지 일대 진지를 점령하였다.

2. 제3대대의 용원리 공격

7월 6일, 동락리 일대에서 국군이 철수한 것을 안 북한군은 국군의 행방을 쫓아 신덕저수지 동쪽 10㎞인 신양리까지 정찰대를 내보냈다. 북한군 제48연대는 “국군이 차를 타고 도망쳤다”는 동락리 주민의 말에 따라 신양리까지 수색하였으나 국군이 보이지 않자, 야음을 이용하여 주력 부대를 음성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동락리에 진출한 야포부대의 엄호 하에 생극에 있던 주력 부대는 차량을 이용, 신양리를 경유하여 7월 7일 05:00경 동락리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7월 6일 오전, 제1대대가 무극리를 공격하고 있을 때 제3대대는 290고지에서 적정을 살피고 있었다. 제3대대는 1개 소대 규모의 북한군 정찰대가 제3대대 배치 지역 북동쪽 5㎞ 지점인 신양리 삼거리에서 음성을 출발, 충주로 가고 있던 연대 보급 차량 1대를 빼앗아 끌고 가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무렵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제3대대가 임의로 철수한 사실을 전해 듣고, 대대 진지를 방문하여 대대장을 질책하며 ‘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한편, 정찰대의 활동으로 적이 동락리와 신덕저수지 부근에 있음을 확인한 제3대대장은 제9중대장 정재갑 중위에게 ‘야음을 이용하여 저수지 옆의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제10중대(중대장 김성배 중위)와 제11중대에게도 가섭산의 310고지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제9중대는 03:00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04:00경에는 대대수색대가 활동하고 있는 새말의 130고지에 도착하여 공격 준비에 착수하였다. 잠시 후 날이 밝아 옴과 동시에 3번 도로에 적의 차량 대열이 나타나자 제9중대는 선두를 공격하였다. 드디어 교전이 벌어진 것이다.

적 이동 대열의 선두인 첨병 중대가 교전에 들어가자 후속 부대들은 제3대대가 있던 310고지 정면에 밀집대형으로 정지하였다. 별로 높지도 않은 고지에서 소규모의 국군이 저항하는 것으로 판단한 듯, 북한군은 포격을 가하면서 첨병 중대로 하여금 이를 소탕하도록 하였다. 주력부대는 별로 경계도 하지 않고 차량에 탑승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적의 이러한 행동은 전장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비전술적 행동이었는데, 제7연대의 전투상보에는 ‘승세에 도취하여 아군을 경시한 행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310고지에 도착하여 적 차량 종대의 집결을 기다리고 있던 제3대대의 제10중대와 제11중대가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06:00경 공격을 개시, 함성을 지르며 저수지 방향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행군 대열의 선두가 공격을 당하는 데도 방심하고 있던 북한군은 측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자 크게 당황하여 차량과 장비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완전히 혼란에 빠진 북한군은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저수지를 피하여 북쪽의 411고지와 덕고개 방향으로 도주하였는데, 일부는 급한 나머지 저수지에 뛰어들기도 하였으나 도주 과정에서 상당수가 격멸되었다.

북한군이 버린 차량에는 박격포와 기관총 등 많은 공용화기와 탄약 등이 탑재된 채 있었다. 제3대대는 연대의 지원을 받아 노획한 장비를 후송하는 한편, 우왕좌왕하는 적을 격멸하면서 추격하였다. 그리하여 11:30경부터는 북한군이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저항을 해오자 연대장 명령에 따라 12:00경 철수하여 가섭산 북사면의 310고지 일대에 방어 진지를 편성하였다.

3. 제2대대의 동락리 공격

7월 6일 15:00경 ‘부용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2대는 안말에서 부용산으로 진출하여 진지를 점령하였다. 다음날인 7월 7일 05:00경, 부용산 정상에 있던 제2대대는 신덕저수지 쪽에서 포성과 교전하는 총성이 들려오자 제3대대가 교전하는 것으로 알고 그쪽을 내려다보다가, 동락리 앞의 도로에 수십 대의 차량이 병력을 가득 태운 채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제2대대 대대장은 대대의 임무가 부용산을 방어하는 것이지만 적을 격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고 결정하고는, 05:30경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① 대대는 동락리의 적을 공격하려 한다. ② 제5중대는 동락리 방향으로 공격하라. ③ 제6중대는 도장골(CR 840950) 방향으로 공격하라. ④ 제7중대는 모도원 방향으로 공격하라. ⑤ 제8중대는 220고지(CR 831945)에서 대대를 지원하라. ⑥ 공격 개시 시간은 06:00이다.

06:00, 제2대대의 기습공격을 받은 북한군은 제3대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저항을 포기한 채 차에서 뛰어내려 북쪽의 498고지와 사기장고개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일부는 민가나 담배밭에 숨었으며, 일부는 왔던 길로 되돌아 도주하려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상당수가 사살되었고, 민간에 숨은 자도 사살, 또는 생포되었으며, 모도원 쪽으로 도주하려던 자는 제7중대에 의하여 격멸되었다.

한편, 당시 제2대대가 사용 가능했던 81㎜ 박격포는 1문뿐이었는데, 대대장과 제8중대장 겸 박격표 반장인 신용관 중위가 220고지에 도착하여 보니 포신만 있고 포판이 도착하지 않아서 사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동락초등학교 교정에서 제3대대 방향으로 사격하던 적의 야포가 포구를 제2대대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잠시 후 포판이 도착하자 위기감을 느낀 대대장은 신용관 중위에게 “네가 직접 사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신용관 중위는 신속히 제1탄을 발사하였는데, 이것이 적의 포 진지 중앙에 떨어졌고, 이윽고 제2탄과 제3탄도 포 진지에 명중함으로써 적의 포진지는 파괴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야적한 포탄상자에 명중되었는지 요란한 폭음과 함께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제2대대는 적의 저항이 별로 없자 제7중대(중대장 이건옥 중위)를 모도원 서쪽 1㎞의 233고지에 배치하여 적의 증원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한 다음, 제5중대(중대장 최익영 중위)와 제6중대(중대장 윤수용 소위)로 하여금 잔적 소탕에 주력하게 하여 소좌 계급인 북한군 제48연대 군수참모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북한군이 유기한 차량에는 82㎜ 박격포와 기관총 등 수많은 공용화기는 물론 다발총 등의 개인 화기도 있었는데, 이는 북한군이 너무나 당황하여 황급히 도주했다는 증거였다. 이는 전투에서 포로가 된 북한군 제48연대 군수참모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전장에서의 방심과 이에 따른 기습공격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례이기도 하였다.

제2대대가 공격해 들어간 동락리 일대에는 북한군 제48연대의 지휘부와 포병중대 및 치중대(輜重隊)가 있었던 듯, 주로 그와 관련한 수많은 장비가 많아서 이를 빠른 시간 내에 후송하는 것이 큰 과제가 되기도 하였다. 노획 장비의 후송 책임을 맡은 허용우 대위는 일부 탄약과 보급품은 현지에서 소각 처리하고, 수많은 차량과 장비를 후송하기 위하여 연대에 차량과 운전병 지원을 긴급 요청하는 한편, 대대 병사들 중 운전 경험이 있는 자를 차출하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때 서북청년단 출신 사병들이 상당수 지원하여 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북한군은 기습을 당한 지 5시간 후인 11:30경, 생극 방향과 411고지 등 2개 방향에서 역습을 시도하였다. 북한군 제15사단의 예비대로 보이는 일부 부대가 생극에서 3번 도로를 따라 동락리 방향으로 접근하고, 신덕저수지 일대에서 분산됐던 북한군 제48연대의 잔존자들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저항을 계속하다 사기장고개와 덕고개 선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411고지·395고지·236고지 방향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북한군의 역습 기도를 간파한 연대장은 노획 장비가 대부분 후송된 것을 확인하고 12:00경 제2대대는 가섭산 북사면의 567고지로, 제3대대는 310고지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양 대대는 이날 오후 565고지와 310고지 선에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제7연대는 이날 저녁때 ‘제1사단이 음성지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진출 중에 있다. 제1사단이 음성지구에 투입되면 연대는 제1사단의 작전통제를 받으라’는 제6사단장의 명령을 받았다.

4. 전투 결과

동락리 기습전은 차량으로 이동 중인 북한군 제15사단 제48연대를 동락리와 신덕저수지·용원리를 연결하는 4㎞ 지역에서 제7연대 제3대대 1개 중대가 선두를 공격하여 정지시킨 다음 전반부는 제3대대가, 후반부는 제2대대가 장비를 노획한 전투였다. 그러나 양 대대의 긴밀한 협동작전에 의해 수행된 것이 아니라 우연의 일치로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공격 전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날 제3대대와 제2대대가 올린 전과는 대단하였다. 제7연대 전투상보에 따르면 사살이 2,186명, 포로가 132명이었고, 노획장비로서는 122㎜ 곡사포 6문, 76㎜ 곡사포 4문, 직사포 7문, 반전차포 5문, 82㎜ 박격포 14문, 61㎜ 박격표 18문, 구경 50 기관총 6정, 중기관총 12정, 경기관총 14정, 자동소총 37정, 소총 919정(기관단총, 38정·M-1 80정·소련식 장총 291정·따발총 184정·기타 소총 326정), 장갑차 4대, 1/2톤 트럭 60대, 1/4톤 지프차 15대, 사이드카 7대, 무전기 4대, 전화기 12대 등이었으며, 그밖에도 마필 24두와 상당량의 탄약(포탄·수류탄·소총탄 등)이 있었다. 아군의 손실은 전사 9명, 부상 53명뿐이었다.

현품을 확인하여 집계한 이 엄청난 노획 장비는 거의 적 1개 연대분의 장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연대급 단일 전투에서는 거두기 어려운 결과였다. 이 막대한 장비는 작전 후 곧 대전에서 일반 국민에게 전시함으로써 국군이 지고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렸다. 그리고 이 장비들에는 소련 제품이라는 표시가 있어 장비 중 일부를 소련이 전쟁에 개입했다는 증거로서 유엔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쟁에서의 승리와 수많은 장비를 노획했다는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가슴아픈 사건이 일어났다. 제7연대가 이날 오후 작전상 동락리에서 가섭산 북사면으로 철수하자 뒤따라 마을에 들어온 북한군 제48연대장 김치구 중좌와 제48연대 생존자들이 “주민들이 거짓말을 해서 우리 부대가 망했다”고 하면서 이날 밤 많은 마을민을 집단 학살했던 것이다. 한편, 제7연대의 전승을 보고받은 대통령 이승만은 제7연대 전 장병에게 최초로 1계급을 특전시키고 격려금 50만 원을 내려주었다. 제7연대의 ‘적 1개 연대 섬멸’이란 승전 소식은 당시 연전연패하며 사기가 저하된 군군에게 용기와 사기를 북돋워주는 크나큰 쾌거였다.

[소여리 전투]

7월 8일 15:00를 전후하여 진지 편성을 완료한 제11연대는 사단으로부터 ‘철수하는 제7연대와 긴밀히 협조하고 적이 추격할지도 모르니 경계를 철저히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무극리 쪽에 배치되었던 제7연대 제1대대의 후위 부대가 18:00경 507번 도로를 따라 음성 쪽으로 철수하자, 사단이 예견했던 대로 그 뒤를 따라 북한군이 접근하고 있었다.

507번 도로를 책임진 제11연대 제2대대장 정영홍 소령은 제8중대장 홍정표 중위에게 기름고개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홍정표 중위는 20여 명뿐인 중대의 지휘를 중대 인사계인 최상린 상사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4명의 병사를 선발하여 약 2㎞ 전방의 기름고개에 경계초소를 설치한 뒤, 대대와는 TS-10 전화기로 통신을 유지하였다. 제7연대 제1대대가 철수한 후 홍정표 중위는 대대장으로부터 ‘제7연대 병력은 다 철수하였다. 지금부터 나타나는 병력은 적군이니 경계를 철저히 하고 적 발견시는 즉각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대대장의 지시를 받은 직후인 18:20경, 홍정표 중위는 기름고개 너머에서 접근하는 일단의 병력을 발견하였다. 1개 대대 규모였다. 홍정표 중위로부터 보고를 받은 제2대대장 정영홍 소령은 적을 진전으로 끌어들여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경계조를 철수시켰다. 그리고 각 중대를 도로 변 가까이로 재배치하는 한편, 연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하면서 대대의 사격 개시와 동시에 지원 포병으로 적의 퇴로가 될 기름고개 일대를 포격해 주라는 포 사격 지원을 요청하였다.

대대장은 중대의 재배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하여 제6중대(중대장 양봉직 대위) 지역으로 갔다. 대대 중앙에 배치된 제6중대는 70여 명의 병력이 혼성되지 않고 중대장이 교체되지 않은 유일한 중대였으나 장교가 부족하여 소대장은 모두 하사관으로 충원되어 있었다. 제2대대장이 제6중대에 당도하였을 때는 일몰 직후였는데, 2열 종대로 적이 접근하고 있는 것이 보였으며, 잠시 후 그 선두가 100m까지 접근하였다.

대대장은 중대장들에게 사격 개시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절대로 사격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고 적이 더욱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적의 행군 대열 절반 가량이 대대의 화망 안에 들어섰고, 그 선두가 제7중대(중대장 조문석 중위) 지역을 막 벗어나려 할 때 대대장은 권총 1발을 발사하여 사격 개시 명령을 내렸다. 제2대대의 일제 사격을 받은 북한군은 우왕좌왕하다가 쓰러져 갔고, 일부 병력은 길 옆의 논으로 뛰어들었으나 곧 격멸되었다. 살상 지대에 미처 들어오지 않은 적들은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제3대대(대대장 김재명 소령) 지역과 기름고개 쪽으로 도주하였으나, 이들은 제3대대의 소총 세례뿐만 아니라 222고지 남쪽에 포진해 있던 제16포병대대 제2중대의 105㎜ 포탄 세례를 받았다.

제11연대 제2대대 및 제3대대와 포병중대의 사격으로 삽시간에 어두워지던 벌판은 불바다가 되었으나 얼마 후에는 어둠에 휩싸여 조용해졌다. 다음날 제2대대는 교전지역에서 백여 구의 북한군 시체를 확인하였고, 많은 장비를 노획하였을 뿐만 아니라 13명의 포로를 획득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나이 어린 소년들이었다. 포로들을 심문한 결과 이곳에 침입하였던 적군은 북한군 제15사단 제49연대 병력임이 확인되었다.

제2포병 중대장 이만호 대위는 이때의 상황에 대하여 “보병부대에서는 조명탄 사격을 요구하였으나 탄약이 없어 조명 지원을 하지 못했다. 만약 조명 지원만 할 수 있었다면 거기 나타난 적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전날의 공격에 실패한 북한군은 다음날인 7월 9일 05:00경부터 포격을 계속하다 09:30경부터 기름고개에서 1개 대대의 병력으로 공격을 하였다. 적이 공격하자 제2대대는 제3대대(대대장 김재명 소령)와 협조하여 야포와 박격포 등으로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불의의 사격을 받은 적은 당황하여 보현산으로 퇴각하였다.

[음성 지역에서 철수하는 국군]

제11연대 제2대대와 제3대대가 소여리에서 북한군을 맞아 싸우던 7월 9일 15:00경, 사정고개가섭산 방향에서는 적이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때 병력 부족으로 잠정 제1대대로 재편성한 제12연대는 제1중대, 제2중대, 제3중대, 제4중대 등을 용산리 계곡 좌우측의 능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북한군이 기름고개에서 공격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즈음, 사단 좌측방 방호 임무를 부여받은 제6사단 제7연대는 제1대대로 하여금 현 진지를 계속 확보토록 하고, 제2대대와 제3대대로 무극리에서 기름고개를 경유, 음성으로 진출하려는 적의 후방을 차단할 목적으로 08:00 보천에서 북서쪽으로 공격, 무극리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사단은 중앙인 용산리 계곡과 우전방인 비산리 방향으로부터 적의 강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제48연대와 교대한 것으로 판단되는 북한군 제50연대의 2개 대대는 야포와 장갑차의 지원을 받으면서 동쪽에서 36번 도로를 따라 음성으로 진출하고 있었고, 1개 대대는 가섭산에서 용산리로 진출함으로써 제13연대 제12연대 제1대대 등이 고전을 하고 있었다.

7월 9일 음성 진입에 실패한 북한군은 날이 밝자 포격을 가하며 좌측과 중앙, 우측 등 3개 방향에서 공격함으로써 사단은 점차 불리한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제11연대의 좌측인 삼생리에서는 지난밤의 침투 기도에 이어 북한군 2개 대대 병력이 7월 10일 새벽부터 262고지에서 하당리 방향으로 진출을 기도하고 있었으며, 07:00경에는 북한군 1개 연대 병력이 야포의 지원 하에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워 비산리에서 공격함으로써 제11연대 제1대대는 힘겨운 전투를 하고 있었다. 용산리의 제12연대 제1대대도 2개 대대 규모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고전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고 있을 때 제1사단은 군단장인 김홍일 소장으로부터 “제1사단은 적을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괴산·미원(CR 7954) 지구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군단장은 제6사단 제2연대가 이미 충주에서 음성 남동쪽 40㎞인 수안보로 물러났기 때문에 제1사단이 퇴로를 차단당할까 염려하여 철수명령을 내렸으며, 같은 날 진천 남서쪽 40㎞의 전위가 위협받게 되자 진천의 수도사단에게도 청주 지구로 철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열세한 병력과 장비로서는 더이상 음성지구를 사수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괴산·미원 지구로 사단을 철수시켰다.

[감우재전승기념관]

감우재전승기념관은 6·25전쟁 때 남한이 최초로 승전하여 국군의 사기를 드높였던 곳에 세워진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산 1-1번지무극전적국민관광지 내에 건립되었다. 당시에 분투한 장병들의 공훈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적극 활용하고자 건립한 곳으로 모두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은 63평, 2층은 42평 규모로, 1층 전시실에는 음성지구 전투 상황을 살펴볼 수 있도록 빔 프로젝터 시설을 갖춘 영상실과 6·25전쟁의 참상을 시기 순으로 구성한 대형 스크린, 6·25전쟁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타임비전과 기복지도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2층 전시실에는 음성지구 전투 관련 자료인 감우재 전투 상황 디오라마(diorama), 전투 회고 매직비전, 총탄에 깨어진 감우재의 종과 6·25전쟁 당시의 국군과 북한군의 군 장비·보급품, 그리고 당시의 생활상과 생활 도구, 전쟁의 참상 등에 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2002년 착공한 감우재전승기념관의 총 사업비로는 국비 3억 원, 도비 1억 5000만 원, 군비 5억 2000만 원 등 총 9억 7000만 원이 투자되었다. 부지 면적은 12,468.00㎡, 건물 면적은 348.38㎡, 전시 면적은 100. 56㎡, 사무실은 29.64㎡의 크기이다. 관람료는 무료이다.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 국경일, 법정공휴일은 개관하지 않는다. 관람이나 견학을 희망할 때는 음성군청 문화공보과나 감우재전승기념관 사무실로 연락하면 원하는 시간에 관람과 체험 활동을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6.02 계급 오류 수정 *김종수 소장 -> 김종수 소령
이용자 의견
이** 음성 전투(1950.07.04.~1950.07.13.)에 국군 1·6사단과 북한군 1·15사단이 전투를 하였습니다. 확인 후 반영해주세요.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에 관한 자료를 보내주시면 검토후 반영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24
안** 소장이 대대장?? 소령이 대대장이든데 오타인가??이에 제1대대(대대장 김용배 소령)는 7월 5일 08:00에 충주를 출발, 음성으로 이동하여 무극리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제2대대(대대장 김종수 소장)는 제3대대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음성으로 이동, 사정고개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또 제3대대(대대장 이남호 소령)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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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음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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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이용 부탁드립니다.
2017.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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