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0944
한자 李尙伋
영어음역 Yi Sanggeub
이칭/별칭 사언(思彦),습재(習齋),졸부(拙夫),충강공(忠剛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쌍정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종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충청북도 음성군
성별
생년 1572년연표보기
몰년 1637년연표보기
본관 벽진(碧珍)
대표관직 연안부사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사언(思彦), 호는 습재(習齋), 졸부(拙夫)이다. 동몽교관 이희선(李喜善)의 아들이다. 부인은 밀양박씨로 첨지중추부사 박주(朴冑)의 딸이고, 음애(陰崖) 이자(李耔)의 외손이다.

[활동사항]

이상급은 문과에 급제하여 1603년(선조 36)에 성균관진사가 되었으며, 1606년 증광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613년 봉상시주부로 승직하였고, 성절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에 평안도사에 제수되었다. 1615년부터 5년간 형조정랑과 풍기군수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형조정랑, 성균관사예, 성균관사성, 안동대도호부사에 제수되었다. 1624년 안동부사와 종부시정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사간원사간이 되었으나 경연에서 역적 윤의립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자 부당함을 논하다가 파면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에 도순검사 심기원의 종사관으로 참여하였으며, 진휼사로 호남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629년에 단천군수, 1633년에 경상도경차관, 연안부사를 지내면서 치적을 쌓았다.

1636년(인조 14)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40여 일 간 아들 이타(李埵)와 함께 인조를 호종하였다. 그러나 묘사(廟社)를 받들고 강화도로 들어간 형 영위사 이상길(李尙吉)을 찾아가다가 강화도가 함락되는 통에 몽고 군사에 의해 순절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엄동 몽산에 자리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이상급은 호종공신으로 추록되었고, 대사헌에 증직된 후 다시 원종공신에 임명되었다. 다시 이조판서로 증직하였다. 1820년에 충강공(忠剛公)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송시열이 신도비에 ‘정호가 행장을 찬하다’라는 글을 썼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12.22 내용 수정 본관 성주 ->본관 벽진(碧珍)
2011.12.12 내용 수정 본관은 성주. 자는 사언(思彦), 호는 습재(習齋), 졸부(拙夫)이다.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사언(思彦), 호는 습재(習齋), 졸부(拙夫)이다.
이용자 의견
관**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12.22
朱* 수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략정보에는 여전히 본관이 성주로 되어 있는데, 이 또한 수정해주시기 바랍니다. 2011.12.21
관**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12.12
朱* 충강공께서는 본관이 성주가 아닌 벽진(碧珍)입니다. 벽진이 옛 성주이긴 하나 성주 이씨와 벽진 이씨가 엄연히 다른바 구분할 필요가 있으니 필히 수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1.12.09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