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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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1리에서는 예전부터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에서 제일 높은 이진봉에 올라가 달집을 태우고 소원을 빌었으며, 줄다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람이 많이 줄어들어서 줄다리기는 하지 못하고 대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척사대회를 하고 있다. 3월 4일. 음력으로 정월 보름에 해당하는 날이었다. 이날 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 질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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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1리에 인민군이 들어오던 낮부터 술렁거렸는데, 당시 이장을 보고 있던 오덕욱 할아버지의 아버지와 함께 마을 뒷산 떡갈참나무로 피신을 갔다. 그렇게 들어온 인민군들은 병암1리를 사이에 두고 한국군과 포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오덕욱 할아버지가 18세에 되던 때에 1·4후퇴를 하였다. 그때 청주시 남일면까지 피난을 갔었다. “그러다가 한국군이 저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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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말마을은 서울에서 내려오다 충주와 음성, 청주로 갈라지는 길목에 있었으며, 6·25전쟁에서 국군의 최초 승전인 감우재 전투가 벌어진 전장에서 가까운 마을로 인민군이 머물기도 하면서 6·25전쟁의 피해가 심했던 마을이다. 특히 생극면 소재지인 신양리와 병암리는 교통의 요지로 충부와 음성으로 통하는 길목이었으므로 전쟁지구였다. 이진말마을도 여기에 포함이 되어 있었고 인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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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오동석(五東碩), 김해김씨’로, 워낙 손이 귀한 집안이라 독자였던 아버지께서 13세의 나이로 일찍 혼인을 하셨다. 당시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에 살고 계셨던 어머니 역시 13세였다. 오덕욱 할아버지는 1935년 10월 18일생으로 5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고, ‘보성오씨’로 원래 고향은 현도지만, 9대조 할아버지가 음성에 터를 잡으셨다. 오덕욱 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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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욱 할아버지 댁은 1·4후퇴 때 집이 다 타버렸기 때문에 광 한 칸에 가족이 모두 살고 있어서 혼인을 치르고도 신부를 데리고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분들은 그날 다 내려왔지만 오덕욱 할아버지만 신부집에 5일 정도 더 묵다가 병암1리로 내려오고, 그 뒤로 8개월을 떨어져 지냈다. 오덕욱 할아버지는 8개월 동안 김금자 할머니를 보러 추석 때 한 번 가고 서울 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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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막거리 는 이진말마을 앞에 있는데 4차선으로 확포장된 37번국도와 생극면 관성리 방향의 일죽 방향의 지방도가 만나는 지점의 다리가 있는 지역이다. 현재 이진말의 오덕욱 할아버지의 논이 있는 자리이다. 바로 그 옆은 응천이라는 하천의 제방이 있다. 이진말의 김지만 할아버지와 오덕욱 할아버지는 구주막길에 대해서 “그전엔 하천에 다리를 놓고서 이게 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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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생활을 서울에서 해서 훈련소 때 외에는 늘 김금자 할머니와 함께 있었다. 오덕욱 할아버지 동생 분들이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김금자 할머니가 밥을 해주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훈련소 때는 어쩔 수 없이 군사우편으로 소식을 주고받았지만, 자대배치를 받고 나서는 주말이면 항상 함께 있었다. “군대 생활은 잘했지, 좋은 데 가서 편안하게. 서울 위로는 올라가보질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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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1리 노인회 회장은 이순복 할아버지(31년생, 77세)가 맡고 있고, 총무는 오덕욱 할아버지가 맡아서 하고 있다. 노인회 회원은 남녀 합쳐서 27명이며, 그 중 남자가 10명, 여자가 17명이다. 노인회 회원들은 마을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농사방법 등 많은 생활의 조언들 주고 특히 오랜 기간 산신제를 지내며 쌓은 경험으로 꾸준히 산신제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노인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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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욱 할아버지는 따로 직장을 다녀본 적이 없고 계속 농사만 지었다. 어릴 때부터 집안이 부유하였는데 오덕욱 할아버지가 군대를 가서 잠시 집안이 기울었다가 제대 후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집안이 일어났다. “옛날에 우리 조부님이 때는 생극면 부자 노릇 했었어요. 몇 년도인지 몰라? 8·15 해방 전이지. 4학년 때인가? 장마 져서 70마지기를 떠내려 보낸 겨 홍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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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말에는 풍물패가 없었는지 여쭈니 오덕욱 할아버지는 예전에는 농악놀이를 많이 했다고 했다. 달집 태우러 올라갈 때도 치고, 내려와 집집마다 지신밟기를 하러 다니면서 치기도 했다. 들에 일을 하러 나갈 때도 농악을 치면서 나가고, 농요를 신명나게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농악을 잘 치던 분들이나, 농요를 잘 부르던 이들도 다 돌아가셔서 예전처럼 놀 수가 없다고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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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회는 병암1리 이장인 원동철(59년생, 49세) 씨가 맡아서 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대동계장이 따로 있었지만 오덕욱 할아버지가 60년도 중반에 이장을 하면서부터 대동계장 역할까지 이장이 맡기로 했었다. 대동회 기금은 정해진 것이 없고 자유에 맡기고 있다. “대동회는 이장이 주관하는 거니까. 옛날에는 대동계장이 별도로 있었는데 지금은 누가 그걸 책임질라고 그래? 그러니까 이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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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골은 이진말에서 남쪽으로 도신리 방향으로 가다보면 이진말과 도신리 경계지점에 이르고, 이 지점에서 병암2리로 가는 길로 갈라지는 곳이 있는데 이 지점에서 동쪽 방향으로 보이는 왼쪽골짜기(구렁)이다. 도둑골에 대하여 오덕욱 할아버지는 “병암2리 들어가는 그 커브머리. 그 구렁이 제일 질지 왜”라고 위치를 이야기하며, 도둑골이라 부른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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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 병암1리 이진말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오덕욱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마을회관 맞은편의 파란색 지붕 집으로 찾아 갔다. 오덕욱 할아버지는 병암1리 이진말 토박이로 마을 이장과 노인회 총무 등을 역임하고, 마을 사업에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다. 특히 병암1리 산신제에 있어 누구보다 많은 경험과 일화를 가지고 있어서 산신제 촬영 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버지 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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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1리는 현재 노인회, 청년회(상조회), 대동회, 부녀회 총 4개의 모임이 조직되어 있다. 병암1리는 각성들로 이루어진 마을이기 때문에 따로 문중 모임은 없다. 마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노인회와 상조회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청년회, 산신제와 대동놀이, 척사대회 등 마을의 주요 행사를 맡아 하고 있는 대동회와 명절 때 제물을 팔아 기금을 모으고 있는 부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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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욱 할아버지는 현재 5개의 모임을 하고 있다. 생극에 사는 사람들끼리 하는 ‘생락회’, 같은 고향 출신 중에 뜻이 맞는 사람들의 모임인 ‘향지회(鄕志)’, 갑술생 동갑내기 모임인 ‘동갑네’, 생극초등학교 졸업회 모임인 ‘동창회’, 그리고 병암1리 노인회이다. ‘생락회’를 10년 전부터 모임을 시작하였고 매월 한 번씩 모이는 먹자계이다. 현재 13명이 회원이고 2만원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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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이진말에는 물레방앗간이 있었는데, 마을 앞 지역의 4차선으로 확포장한 37번 국도와 37번 국도 구도로 사이에 위치하였다. 오늘날 이진말에는 응천이라는 하천이 있고 문화마을 옆으로 개울이 흐르지만 옛날에는 물이 흔하였다고 한다. 물레방앗간과 물이 흔했던 것에 대하여 이진말마을의 오덕욱 할아버지(35년생, 73세)는 “옆 마을 중말에다가 옛날에 보를 막아가지고선 지금 저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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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욱 할아버지의 부인인 김금자 할머니(36년생, 72세)가 부녀회장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1998~99년쯤에 다른 분에게 부녀회장직을 넘겨주었다. 그러다 부녀회비로 80~90만원 정도를 모았었는데 부녀회 회원들에게 나눠주고 잠시 부재로 있다가 4년 전쯤에 현재 부녀회장인 한복실 부녀회장이 맡아서 다시 부녀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 당시에 매월 3천원씩 회비를 걷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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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제를 지낸 다음날 아침인 2월 20일, 산신제 때 사용한 금줄이 태워지고 8시 30분 쯤 되자 마을회관에 어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마을회관 마당에서 김현동 어른과 김영섭 제관이 돼지 분육을 시작하였다. 돼지머리를 자르고, 몸통은 4등분한 뒤 1㎏씩, 총 60명분으로 골고루 나누어 비닐봉투에 담았다. 단 산신제를 지내느라고 애쓴 제관 3명과, 도와준 동네 청년 및 어른들은 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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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1리는 140년 전부터 매년 음력 정월 2일에 산신제를 지내왔다. 그래서인지 산신과 산제당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산신제 촬영을 위해 2월 19일에 마을을 찾아 갔는데, 제물로 올릴 돼지를 잡고 간단히 점심을 먹던 중 병암1리 마을 주민인 김현동 어른(54년생, 54세)과 안순일 어른(48년생, 60세)이 산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병암1리에서 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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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제물 준비 밤 8시 12분에 산신제를 지낼 준비를 시작하였다. 깨끗하게 손을 씻고 떡을 찧을 준비를 하고 메 지을 쌀을 씻었다. 김영섭 제관은 제물로 올린 다시마를 튀기고 떡을 찧고 메를 짓기 시작했다. 오덕욱 할아버지는 산제당 안에서 제물 준비를 하였다. 준비 과정을 적어놓은 차례대로 그릇에 제물을 담았다. 모든 음식은 공양주인 김영섭 제관이 준비하고, 오덕욱 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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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금줄치기 마을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에 금줄을 쳐야 한다는 말을 듣고 새벽 일찍 마을에 찾아가니 금줄은 아직 쳐지지 않고 마을회관 앞에 준비되어 있었다. 6시쯤 되자 오덕욱 할아버지가 정갈한 모습으로 금줄을 치러 나왔다. 금줄은 총 3줄로, 끝과 끝을 묶어서 이었으며, 중간 중간에 하얀색 천이 끼워져 있었다. 금줄은 ‘부영건설중기’ 간판 오른쪽에 있는 골목에서 첫 번째 집에 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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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프면 즉시 병원에 데려가지만 예전에는 그저 신에게 빌고 하면서 기도를 했다고 한다. 예전에 오덕욱 할아버지가 초상집에 갔다 와서 몸이 많이 아픈 적이 있었다. 감기 걸린 것 마냥 으실으실 거렸다. 이웃의 나이 든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상문살이 껴서 그런 거니까 풀어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웃집 할머니는 팥죽을 써서 바가지에다 넣고 칼로 방문을 박박 긁고, 콩하고 팥하고 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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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욱 할아버지에 이어 이번에는 다섯째 딸이 또 상문살이 들었었다고 한다. 다섯째 딸이 태어나고 얼마 안 되서 당숙모가 돌아가셔서 장례 지낸 건하고 행장하고 뜯어서 보자기로 쓰려고 집에다 뒀는데 그때부터 애기가 젖을 먹지 않았다. 젖을 자꾸 외면하고 병원에 가보니 애기가 똥을 못 눠서 그런 거라고 했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똥을 눴는데도 애기가 계속 젖을 안 먹어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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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은 오덕욱 어른의 아버님이 친척 아주머니 돌아가셨을 때 만장기를 가지고 왔는데, 하우스에 쓴다고 화장실에 갔다 놨는데 그때부터 아버님 손이 가시에 찔린 것처럼 부었다고 한다. 그래서 병원에 가보자 하니깐 찢을까봐 겁나서 싫고 약만 사다 드셨다고 한다. 약을 먹으면 잠시 가라앉고 또 며칠 뒤에 다시 부어오르곤 했다. 그래서 무당한테 물어보니 상문살 때문이라고 해서 팥죽을 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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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말에는 예전부터 대대로 살아오던 마을 사람들과 새로이 조성된 문화마을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마을 살림을 이끌어가고 있다. 문화마을 조성은 1999년 9월 30일 2000년 문화마을 사업지구로 선정되어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시행계획이 승인되었으며, 2000년 12월 26일 착공하여 2002년10월 31일에 준공하였다. 이진말 문화마을은 면적이 62,381㎡이며, 조성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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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낭댕이는 이진말마을 북동쪽으로 마을이 끝나는 지점 새로 놓은 다리에서 200m 동쪽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진말마을의 서낭당은 이 마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북쪽 맞은편 마을인 신양리 새천이마을에 한 곳, 개울 건너 중말에 한 곳 등 서낭당이 삼각형을 이루고 서 있었다. 서낭댕이에 대하여 오덕욱 할아버지(35년생, 73세)는 “서낭길이 어디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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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안택이라고 해서, 집안 편하라고 고사를 많이 지냈다고 한다. 또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이유 없이 든 병을 잡기 위해 굿을 하기도 했다. 무당은 동네 무당도 있고 타동네 무당도 데려다 하기도 했다. 오덕욱 할아버지 댁에서는 굿은 하지 않고 안택만 했다고 한다. 안택은 3년에 한 번 정도씩 시월상달에 생기복덕 가려서 날을 잡고 한다. 무당을 부르지는 않고 계속 기도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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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1리에서는 민요를 많이 조사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들은 예전 어렸을 때 아버지 대 분들이 농요를 부르는 것을 들었고 논농사를 지으며 부르기도 했지만, 지금은 할 줄 아는 이들이 모두 돌아가셔서 제대로 부를 수가 없다고 했다. 할머니들도 「자장가」나 「불아불아」와 같은 아기를 재우거나 어를 때 부르는 소리 한, 두 소절 외에는 민요를 잘 기억하지 못했다. 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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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봉 은 이진마을 동쪽에 있는 산으로 이진봉 밑에 마을이 있어서 마을 이름도 이진말이다. 이진봉이라는 산 이름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던 산이라 오랑캐 이(夷)자와 진을 치다의 진(陣)자를 써서 이진봉이라 하였다 한다. 이진봉에는 성의 흔적이 있는데 오덕욱 할아버지는 성에 대해서 “지금은 까내려와서 없어요. 아주 도자를 들여서 삼 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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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 이진말은 지리적으로 충청북도 북서부 지역에 있는 음성군의 중북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생극면 생리, 북서쪽으로는 응천, 남쪽으로는 생극면 도신리, 북쪽으로는 생극면 신양리와 접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중부고속도로를 따라오다 일죽 나들목으로 나오면 동쪽으로 10㎞ 지점의 생극면 소재지에 이르게 되며, 면소재지에서 금왕 방면으로 1㎞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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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봉산성 은 병암리 이진말마을 앞 동남쪽의 해발 231.2m의 이진봉에 있는 산성이다.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 연구하여 발행한 「음성군문화유적분포지도」는 ‘이진봉의 정상부에 축성된 테뫼식 토축산성’이라 하고 있는데, 이 마을의 김지만 할아버지(27년생, 81세)와 오덕욱 할아버지(35년생, 73세)는 이진봉산성이 산 정상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뒷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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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군 생극면 병암1리(이진말)는 매년 음력 정월 2일에 마을 뒤에 있는 산제당골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2월 8일 병암1리 마을회관에서 오덕욱 할아버지(35년생, 73세)와 이순복 할아버지(31년생, 77세), 김지만 할아버지(27년생, 81세)를 만나 산신제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산신제는 마을 사람들이 아는 것만 해도 거의 140여년 전부터 지내왔으며, 전해 내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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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병암1리를 찾아가서 마을회관 남자방에 있던 오덕욱 할아버지(35년생, 73세)와 이순복 할아버지(31년생, 77세), 김지만 할아버지(27년생, 81세)에게 지명이야기를 듣다가, 오덕욱 할아버지가 도끼골 지명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었다. 원래는 정지골이라고 불렀는데 70년도쯤에 도끼로 사람을 죽인 사건이 나서 그때부터 ‘도끼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명 ‘도끼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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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제를 준비하는 중에 산신제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세 제관과 인터뷰를 하였다. 세 분 중 제관 경험이 제일 많은 오덕욱 할아버지께 먼저 여쭈었다. 예전에는 산제당이 목재로 지은 초가여서 1년에 한 번씩, 가을에 대동계를 하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올라와 새로 수리를 했었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하는 행사가 산제당 수리였다. 산신제 지내는 방식은 예전에 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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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말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마을 사람 전체가 두 패로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였다. 이진봉에 올라 망월을 하며 달집태우기가 끝난 뒤 내려와서 농악을 치면서 줄을 다렸다. 매년 하지는 않고 3년에 한 번 정도 하였으며, 6·25 이후까지도 했다고 한다. 암줄과 수줄로 나누어 줄을 엮었으며, 암줄과 수줄을 끼운 뒤 비녀목을 채워 고정시켰다. 줄을 다리는 패는 골목을 기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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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말 사람들은 정월 초순경 그해 처음으로 맞는 쥐날에 쥐불놀이를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다른 동네 사람들하고 쥐불놀이를 했는데, 아주 크게 싸움을 벌였다. 이진말은 주로 곤재 사람들하고 싸웠다. 마을 앞 개울에 가서 뚝방에다 불을 놓고 양쪽에서 마주보면서 ‘니가 잘했네 내가 더 잘하네’ 하면서 싸웠다. 그러다가 개울 건너까지 서로 돌을 던지면서 싸우는 ‘석전’까지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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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1리는 오늘날 뚜렷한 주산업이 없이 일반적으로 벼농사와 밭농사로 고추, 콩, 참깨, 인삼 등의 농사로 경제적 생활을 하고 있지만,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참외농사가 주산업이었다. 음성 생극 참외 하면 알아줄 정도로 경작을 많이 하고 참외 맛도 뛰어났었다. 이진말을 비롯한 이 지역 사람들은 참외농사를 지어 생활을 하고 자식들 공부도 시켰을 정도로 참외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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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청년회 회장은 박건수 씨로 감곡에 나가 있고 부모님만 병암1리에 살고 있다. 청년회 모임은 일 년에 2번, 추석 전날과 음력 정월 전날 모이는데, 주로 상조회 역할이 크다. 이야기를 해주신 오덕욱 할아버지가 청년일 때는 청년회 모임이 따로 없었고 마을 청년회가 생긴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마을에 점점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지고 상을 당하면 일손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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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8개월 만에 시댁으로 김금자 할머니가 오고, 그 다음해 9월에 큰 딸이 태어났다. 친정이 서울로 이사를 가서 김금자 할머니가 봄에 올라갔는데 가을에 아이를 낳고 내려 왔다. “애기 낳으러 간 게 아니고, 처갓집이 장모님이 서울로 이사를 갔는데, 우리 처외숙이라는 분이 우리 장모님 남동생이 이양반이 사장이야. 1·4 후퇴, 6·25 때 내려가서 대구에 공장을 차린 겨. 장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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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1리에서는 참외농사가 끝나면 그루갈이로 호박농사 즉 애호박농사를 지었다. 애호박농사에 대해 오덕욱 할아버지는 “참외농사 하구 후반기로 호박을 심어요. 애호박. 수확이 곱이 나오는 거야. 참외 나오는 거만큼 거의 다 나와. 참외농사를 져서 다 끝나고 참외를 뽑아내고 다시 호박을 심는 거야. 그때 호박 시세가 참 좋았어요. 그게 언제 나쁜가 하면은 장마철에 값이 비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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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이야기를 듣기 위해 먼발치에서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김금자 할머니를 오덕욱 할아버지 옆으로 모셔왔다. 뭘 그런 걸 물어보냐면서 두 분 모두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오덕욱 할아버지가 21세, 김금자 할머니가 20세였던 1955년에 혼인하였는데 당시에는 스무살만 되면 혼인을 하였다고 설명해 주었다. 오덕욱 할아버지의 부인인 김금자 할머니는 1936년 경기도 율면에서 4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