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A020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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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문예은 |
[농업용수를 확보하라]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목적으로 한 간척 사업으로 만들어진 땅 광활면에서 가장 큰 숙제는 바로 농업용수 확보였다. 소금기 있는 땅에서 제대로 벼를 수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일본 당국은 미곡 생산에 중요한 부분인 동진강 유역의 관개용수 확보에 비중을 두고 운암댐 건설에 착수한다.
운암댐은 높이 26m에 이르는 콘크리트 댐으로 섬진강 수계에 건설된 관개용 댐이었다. 섬진강 시발은 진안 팔공산으로 여수만에 이르는 장장 228㎞의 강으로 임실군 운암면의 섬진강 줄기를 막아 그 물을 동진강 유역과 하구에 위치한 광활간척지까지 연결하고자 한 것이다. 운암댐은 1928년 완공된다.
시기적으로 보면 간척 사업과 운암댐 건설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광활 사람들의 생명수 운암호]
운암댐에서 간척지인 광활면까지는 직선거리로도 장장 40㎞에 육박한다. 이 운암호의 물이 정읍을 거치고 김제평야를 돌아서 이곳 간척지에서 황해로 흘러 들어간다. 이 먼 길을 타고 내려오는 물은 땅을 파도 먹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광활간척지에서 더할 나위 없는 귀중한 식수가 되고, 농사를 짓는 농수로 사용되는 생명수가 되었다. 이 수로를 관리한 것이 동진수리조합이다.
운암댐에서 오는 물은 수문이 열릴 때마다 수로를 타고 광활로 흘러 들어갔다. 수로는 간선(幹線)[줄기가 되는 주요한 선]과 지선(支線)[본선에서 곁가지로 갈려 나간 선]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간선에서 지선으로 물을 넣어 각 논으로 물을 대는 형식이었다.
용수를 통해 물을 공급하여 농사를 짓고 배수로 물이 빠져나오는데, 이 배수에 수문을 만들었으며, 두꺼운 판자로 문을 만들어 쇠파이프를 연결했다. 핸들로 수문을 열고, 닫고를 반복하며 물 관리를 했던 것이다. 광활에서 쓰고 배출하는 물은 방조제 쪽의 배수갑문으로 빠져나갔다.
광활면의 3답구와 5답구 사이에는 둘레가 4㎞가 되는 진봉저수지가 있었다.
물이 귀할 때였기에 저수지에 물을 담아 놓고 광활과 진봉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진봉저수지는 1966년 광활면에 수도 시설이 보급되면서 흙으로 메워서 농지로 개간했다.
지금도 마을을 타고 흐르는 도랑물과 배수갑문이 남아 있어 옛날 전국에서 제일이었다는 광활의 수리 시설을 짐작하게 해 준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