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610 |
---|---|
한자 | 新頭里鄭平九墓 |
영어의미역 | Jeong Pyeonggu's Grave in Sindu-r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두리 산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문이화 |
성격 | 묘 |
---|---|
건립시기/일시 | 조선 후기 |
관련인물 | 정평구(鄭平九)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두리 산5 |
소유자 | 동래정씨 종중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두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무신 정평구의 묘.
[개설]
정평구(鄭平九)는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제월리에서 1566년 3월 3일 출생하여 1624년 9월 죽었다. 무관 말단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는데,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 의해 진주병영 별군관(別軍官)이 되었다. 정평구는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金時敏)의 휘하에서 화약을 다루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일본의 신식 무기인 조총의 위력에 조선군이 압도당하자 비행기의 일종인 비거(飛車)를 만들었다.
정평구가 만든 비거는 우리나라 기록에는 보이지 않고, 일본에서 편찬된 『왜사기(倭史記)』에 “비거로 말미암아 왜군이 작전을 전개하는 데 큰 곤욕을 치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비거는 한 번에 무려 30~50리를 날았다고 한다. 정평구는 비거를 이용하여 진주성으로 식량을 나르는 한편, 아군의 식량 보급과 군사 연락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또 비거를 이용해 경상도 고성에 갇혀 있던 성주를 탈출시켰다고도 한다.
비거는 중국 진나라의 장화(張華)가 쓴 『박물지(博物志)』에도 나오며, 북송의 시인 소식(蘇軾)의 「금산묘고대시(金山妙高臺詩)」에도 나온다. 이로 미루어 그 이전에 이미 있던 것을 정평구가 응용,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 한글학자 권덕규(權悳奎)가 쓴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와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에도 비거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고, 노성(魯城) 출신 윤달규(尹達圭)가 제작법을 기록해 두었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현재 설계도는 남아 있지 않다. 최남선(崔南善)은 비거를 만든 정평구를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위치]
신두리 정평구 묘는 김제시 부량면 신두리 명금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형태]
정평구의 묘는 부인 신씨의 묘와 나란히 놓여 있다. 봉분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며, 묘 앞에는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오석으로 된 비가 서 있다. 부부의 묘 중앙에서 약간 왼쪽으로 상석이 하나 놓여 있다.
[금석문]
묘비에 ‘평구동래정공유연지묘 배유인평산신씨지묘(平九東萊鄭公惟演之墓配孺人平山申氏之墓)’라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