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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대첩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482
한자 金溝大捷
영어의미역 The Battle of Geumgu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백덕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대일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597년(선조 30) 9월경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597년(선조 30) 9~10월경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 지역
관련인물/단체 원신|김언공

[정의]

1597년 정유재란 때 원신과 김언공전라북도 김제시 금구 지역에서 왜군을 궤멸시킨 전투.

[역사적 배경]

일본은 명과의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선조 30) 1~2월에 14만5천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조선을 침략하였다.

[목적]

금구대첩(金溝大捷)의 목적은 직산전투에서 패퇴한 왜군이 정읍을 향하여 남주할 것을 예상하여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인 원신과 김언공(金彦恭)의 군사로 기습 공격을 하여 적을 패퇴시켜 무력화하는 데 있었다.

[발단]

정유재란이 일어나 1597년 8월 16일에 남원성이 함락되고 황석산성 또한 공략되더니 8월 25일에는 전주성마저 점령당하였다. 왜군은 이러한 기세로 한성을 향해 북상하던 차에 9월 7일 직산전투에서 패했는데, 이때 한산·서천에서 되돌아 금강을 건너 용안·함열·익산을 거쳐 금구·태인·정읍 방면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경과]

일본의 주력군이 정읍을 향하여 남주할 것을 예상한 전라도의 조방장 원신과 김언공은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기로 하였다. 이 두 장수는 서로 의논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 정공법으로 맞서 싸우면 도저히 이길 공산이 없으므로, 작전상 유리한 지형을 골라 복병을 일으켜 엄습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먼저 금구에서 험한 장소를 골라 복병을 배치하고 숨을 죽이면서 패주하는 적을 기다리게 하였다. 복병이 위치했던 지역은, 한쪽은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또 다른 쪽은 저습지였으며, 앞으로 나가자면 길의 곡절이 심하고 뒤로 물러서면 길이 좁은 지역이었다. 두 장군은 산봉우리마다 기치를 세우고, 봉화를 올리게 하였으며, 군사들은 북을 치고 나발을 불어 요란스럽게 적의 후미를 추격하였다.

적은 동요하지 않고 태연하게 남하했는데 이때 금구의 매복 장소에서 복병이 일시에 일어나 적의 선두를 치게 되었다. 적은 앞으로 돌파하자니 구곡길이 위태롭고, 옆으로 비키자니 험산과 습지가 가로놓여 있었으며, 뒤로 물러서자니 너무 좁은 길이었다. 이때에 원신과 김언공의 군사가 뒤에서 나타나 고함을 치며 총통과 화전을 쏘아대며 적을 궤멸시켰다.

[결과]

금구대첩에서 패한 왜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창검·조총 등을 내버린 채 퇴각하다가 다시 대오를 수습한 뒤 정읍으로 들어갔다. 왜군은 겨우 숨을 돌리고 대책을 의논하였는데, 이를 정읍회의라 하였다. 금구전투에서 혼비백산이 된 적장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 시마즈 다다유타[島津忠豊] 등은 정읍회의에서 남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전승으로 금구 지역에는 왜통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왜통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용지면의 경계에 있는 구릉지대로, 근래에 와서는 부르기 좋게 애통으로 변음되었다. 금구대첩이 우리의 승리로 돌아간 이틀 뒤에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우리 수군이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어 왜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금구대첩은 일본과 명의 강화회의가 결렬되자 왜가 재무장하여 침략함으로써 전 국토가 다시금 유린당할 위기에서 치러진 전투였다. 직산전투에서 패퇴하여 남하하는 왜군을 궤멸시킨 금구대첩은 왜군이 후방에서 힘을 축적하여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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