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충청북도 음성군 일원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 일제의 한국 강점과 무단통치에 대항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충청북도 음성군 일원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1919년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에 걸쳐 군내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에서는 초전리 서당에 다니던 김영익·정민영·최만득·...
충청북도 음성시에서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국권회복운동과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 음성 지방은 1905년의 중기 의병 때부터 의병 활동과 관련한 구체적인 기사들이 보이는데, 특히 1907년 구한국군대의 강제 해산 이후 봉기한 후기 의병에서 더욱 활발한 양상을 보인다. 또한 3·1운동 때에는 군내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지는 등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선 후기 국...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1945년 광복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통치 시기. 음성군은 1895년(고종 32)에 지방 관제를 23부로 개정할 때 충주부 20개 관할군의 하나인 음성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8도 체재로 정비될 때 충청북도 음성군이 되었다. 그후 1906년 지방제도가 정비될 때 충주군에 소속되었던 13개 면을 이임받아 동도면·남면·원서면·근서면·사...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에 음성읍 초천리 백양 백양서당(栢陽書堂) 훈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서당 학생이던 정민영(鄭玟永), 최만득(崔萬得)과 아들 정대영(鄭大永)의 1919년 3월 28일 음성시장에서의 시위를 도와주는 등 음성 지역에서의 3·1운동에 이바지하였다. 공은 평생 일본인을 ‘왜놈’이라 증오하고 한일합방 후 들어온 양말을 ‘왜말’이라 부르고...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선비. 본관은 초계. 자는 응수(應壽), 호는 소죽(小竹). 정창(鄭昌)의 후손이며, 판관 정시혁(鄭時赫)의 9세손이다. 조부는 정홍유(鄭洪猷), 아버지는 정학일(鄭學一)이다. 어머니는 하동정씨로 통덕랑 정해승(鄭海昇)의 딸이다. 부인은 경주이씨로 이다연(李多延)의 딸이다. 아들은 정보영(鄭輔永)·정민영(鄭玟永)·정택영(鄭澤永)이다. 천거로 문묘직...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민영은 1901년 1월 7일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881번지[초천로174번길 19-7]에서 문묘 직원이던 정모선(鄭謨善)의 차남으로 출생하였으며, 1970년 12월 6일에 향년 70세로 별세하였다. 1919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백양서당에 다니고 있던 정민영은 평소 알고 지내던 김영익(金榮翼)으로부터 3·1운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