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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1011
한자 日帝强占期
영어의미역 Japanese Colonial Period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걸순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1945년 광복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통치 시기.

[행정구역의 변천]

음성군은 1895년(고종 32)에 지방 관제를 23부로 개정할 때 충주부 20개 관할군의 하나인 음성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8도 체재로 정비될 때 충청북도 음성군이 되었다. 그후 1906년 지방제도가 정비될 때 충주군에 소속되었던 13개 면을 이임받아 동도면·남면·원서면·근서면·사다산면·감미면·생동면·금목면·천기면·소탄면·기내면·거곡면·대조면·법왕면·두의면·맹동면·무극면 등 17개 면을 관할하였다.

1913년에는 충주군 소파면과 사이면이 이입되고, 경기도 음죽군 동면 내노평리의 일부와 하율면 내총곡리의 일부, 상율면 팔성리의 일부 및 석교촌리의 일부가 편입되었다. 이듬해인 1914년의 군면 통폐합 때에는 종래의 17개 면에서 군내면·원남면·금왕면·삼성면·대소면·생극면·감곡면·맹동면·소이면 등 9개 면으로 대폭 감소되고, 명칭도 맹동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운 이름이 부여되었는데, 이후 광복 때까지 행정구역은 큰 변동이 없었다.

[사회경제]

일제강점기 음성 지방의 사회경제 상황은 매우 열악하였다. 그 까닭은 워낙 군세가 약하기도 하였지만,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수탈 때문이었다. 1937년에 편찬한 『음성읍지(陰城邑誌)』에 의하면 당시 음성 지방의 농가는 자작농이 1,412호, 자작겸 소작농이 2,531호인 데 반하여 순소작농이 7,870호에 이르고 피용자도 326호나 되어, 절대적인 농업구조였던 음성의 농가가 일제의 농촌 수탈로 더욱 하층 분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충북선 철도의 청안~충주 구간 부설이 논의될 때 음성군민들은 교통의 편의와 물류의 유통을 위해 음성읍 내에 역이 설치되기를 요구하여 1928년 말 개통을 보았다. 충북선 부설 이후 음성역은 여객이나 화물의 발착에서 청주·청안·정봉·충주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인구의 증가 등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는 식민지하의 개발뿐만 아니라 수탈과 침략적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국권회복운동]

조선 후기 국권이 기울어가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고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나는 등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었다. 음성 지역에서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분개하여 봉기한 전기 의병의 활동이 산발적으로 보인다. 음성 지역에서 의병 활동과 관련한 구체적인 기사들이 보이는 것은 1905년의 중기 의병 때부터로, 특히 1907년 구한국 군대의 강제 해산 이후 봉기한 후기 의병에서 더욱 활발한 양상을 보인다. 「한국주차군사령관보고」 등의 자료에 의하면, 음성 일원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수차 일제와 접전을 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항일독립운동]

1919년의 3·1운동 때에는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에 걸쳐 음성읍은 물론 소이면, 대소면, 삼성면, 감곡면, 맹동면, 원남면, 금왕면 등 군내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음성읍에서는 초전리서당에 다니던 김영익·정민영·최만득·정대영 등의 주도로 3월 28일의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이 결행되었다. 소이면 한내[閑川] 장터에서는 김을경·이중곤·권재학 등의 주도로 수많은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시위군중은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민병식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주동자를 연행해 가자 분노한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로 달려가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히 항쟁하였다. 그러나 충주에서 응원 출동한 일본 수비대의 무차별 발포로 십수 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대소면의 만세운동은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박병철·민병철·박영록·박제성 등이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이들은 4월 2일 밤 사전 약속에 따라 천여 명의 군중이 대소면사무소에 모이자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때 면장과 면직원들이 나타나 시위 중단과 해산을 종용하자, 격분한 시위 군중들은 면사무소 유리창과 기물을 부수고 장부를 파손시키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면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진천 수비대가 응원 출동하여 무력으로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다.

삼성면에서는 이성용의 주도로 4월 2일 선정리천평리 일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성용은 이날 밤 수십여 명의 주민들과 선정리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다음, 군중을 이끌고 경찰관주재소가 있는 천평리로 이동하여 격렬한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피체된 이성용은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으나, 일제의 극심한 감시와 탄압으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밖에도 군내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는데, 감곡면주천리에서는 4월 1일과 2일 만세시위가 있었으며, 3일 밤에는 문촌리에서 수십 명의 주민들이 송석봉의 주도로 응봉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맹동면에서는 3월 20일 주민 수백여 명이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벌였고, 4월 2일에는 면소재지인 쌍정리 뒷산에서 김화서·김해룡·백순규 등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원남면에서는 4월 5일 보천시장에서 시위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11일에는 주봉리에서 80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를 외쳤다. 금왕면에서는 4월 2일 내송리에서 1천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3·1운동의 고전적 통계자료인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3·1운동 당시 음성 지방에서는 6회의 만세시위에 2천여 명의 군중이 참여하여, 이중 여섯 명이 순국하고 열 명이 부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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