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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1073
한자 鄭玟永
영어음역 Jeong Min You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888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박종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888 지도보기
성별
생년 1901년 1월 7일연표보기
몰년 1970년 12월 6일연표보기
본관 초계(草溪)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정민영은 1901년 1월 7일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881번지[초천로174번길 19-7]에서 문묘 직원이던 정모선(鄭謨善)의 차남으로 출생하였으며, 1970년 12월 6일에 향년 70세로 별세하였다.

[활동사항]

1919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백양서당에 다니고 있던 정민영은 평소 알고 지내던 김영익(金榮翼)으로부터 3·1운동이 확산하는 상황을 전해 듣고, 음성 지역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당시 정기선(鄭騏善)이 훈장으로 있던 백양서당에 다니는 최만득(崔萬得), 정대영(鄭大永)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추진하여, 1919년 3월 28일 음성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거사에 필요한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28일 오후 4시에 정민영은 서당 동료들과 함께 음성시장에 집결하여 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만세 운동의 선두에서 시가 행진을 하였으며, 1919년 4월 6일 밤 횃불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대를 선고받아 상고하였으나, 동년 5월 5일 경성복심법원과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형(刑)을 받았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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