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3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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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九耳面抗爭 |
영어공식명칭 | Guimyeon Resistance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상원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50년 7월 - 구이면 항쟁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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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구이면 항쟁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
성격 | 게릴라 활동 |
관련 인물/단체 | 이학희 |
[정의]
한국전쟁 당시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일대에서 이학희 등이 중심이 되어 북한군을 토벌하기 위해 펼친 게릴라 활동.
[개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학희는 피난을 가지 않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힘을 합쳐 완주군 구이면 평촌에서 게릴라 활동을 펼쳤다.
[역사적 배경]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점령을 당한 전라북도 완주군에서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우익 인사들이 북한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다가, 전라북도 완주군이 국군에게 수복되기 직전에 학살을 당했다.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항가리 양산마을에서는 15명의 우익 인사들이 북한군에 항거하다가 학살되었다.
[경과]
대한청년단원이던 이학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을 가지 않고 고향인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에서 게릴라 활동을 펼쳤다. 이학희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힘을 합쳐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한내제방에서 전투 준비를 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방어할 수가 없자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보광재에서 위장한 채 게릴라 활동을 펼쳤다. 1950년 7월 20일 북한군이 전주시를 점령하게 되자, 이학희는 동지들과 함께 고덕산을 타고 전주시의 전주사범학교[현 전주교육대학교] 뒷산에 잠복해 있다가 “대한민국 국군이 곧 진주하니 안심하고 계시라”라는 내용의 삐라를 뿌리고 전라북도 임실군 신덕면으로 후퇴했다. 게릴라 활동 중 북한군에 체포되어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었으나 다행히 탈출했다.
[결과]
구이면 항쟁에서 이학희는 이후 경찰에 투신하고 전주시 무덕전에서 2천명 의용군을 모집해서 빨치산 토벌 작전에 나섰다.
[의의와 평가]
구이면 항쟁은 한국전쟁 당시 전라북도 완주군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었으나, 피난하지 않고 게릴라 작전을 펼쳤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