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E03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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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안경희 |
❚ 일 년에 한 번 발휘하는 솜씨
우리네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인상의 양명석(65) 씨는 주곡리에서 평생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평범한 주민이다. 이런 양명석 씨가 일 년에 딱 한 번 자신의 숨겨온 솜씨를 보여주는 날이 있으니, 그날이 바로 장승제를 지내는 날이다. 양명석 씨는 장승제의축관을 맡아 축문을 쓰며, 장승에 「天下大將軍逐鬼神」(천하대장군축귀신), 「地下女將軍逐鬼神」(지하여장군축귀신)이라는 명문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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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을 쓰는 축관
❚ 얼렁뚱땅 익힌 한학
양명석 씨는 주곡리에서 태어나 평생을 주곡리에서 보낸 토박이이다. 그런 그의 어린 시절은 배고프고 힘들었던 기억과 함께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개구쟁이 짓을 일삼던 즐거운 추억이 가득하다.
양명석 씨는 어릴 적 그의 아버지가 하시던 정미소 일이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점점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되었고 아버지는 모든 것을 빈손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 어렵고 힘들었던 집안 환경으로 인해 당시 지금의 상월초등학교에 다니던 양명석 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과 집안일들을 돕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배움을 그대로 그만 둔 것은 아니었다. 주곡리에는 청주양씨 문중에서 운영하는 종학이 존재하여 학교를 다니기 힘든 아이들에게 무료로 한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양씨라면 꼭 그곳에 가서 글을 배워야 했기에 양명석 씨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곳에 들어가 천자문부터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제사 지낼 때 제방이라도 써야지 벽에다가 제사를 지낼 순 없자나. 그래서 종학을 운영하고 양씨집안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거야.”
이러한 양씨 집안 어른들의 생각은 마을에 종학을 두게 하였고 종학은 청주양씨가 아니더라도 배움이 필요한 많은 학생들에게 문을 열어두어 누구든지 학문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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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헌사 전경
하지만 집안이 어려웠던 양명석 씨는 수시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와야 했으며 소소하고 작은 집안일까지도 해야 했기에 서당에 나가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고, 한참 놀고 싶은 어린나이로 친구들과 노는 것이 좋아 서당에 빠지는 날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 그는 어렵게 천자문과 명심보감, 사자소학 정도를 보게 되었다.
❚ 한학의 배움을 부정하다.
어느새 20살의 청년으로 자란 양명석 씨는 군대에 갈 나이가 되어 문중어른들의 도움으로 들어가기 힘들다는 카투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가 생각하지 못한 장벽이 존재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영어였다. a b c 알파벳도 모르고 군대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에게 시련이면서도 어찌 보면 기회가 되었다. 또한 한학을 부정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처음 그곳에 들어가서는 그도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고 한다.
“워낙 기초도 없는디다가. 한 달에 한 번 가서 배우는데 뭐가 되겠어. 3개월 하다가 그만뒀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해 보았지만 스스로 안 된다는 걸 느낀 그는 영어 공부를 그만 두었으며, 더 나아가 어린 시절 배웠던 한학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죽어도 한문 공부 안해야지. a b c 영어 알파벳이나 가르쳐 줬으면 이런 설움 안 받지.”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고 그것은 한문을 멀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그 때 배워 두었던 것이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
그렇게 양명석 씨의 인생에서 45여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게 된다. 그도 점점 나이를 먹어갔으며, 마을 어르신들도 하나 둘 세상을 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곡리 장승제는 마을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들이 합쳐져 오랜 시간 이어져 오게 된다.
“그냥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맡은 거여. 내 나이 또래 한자 좀 쓸 줄 아는 이가 나밖에 없거든. 그래도 내가 조금 아니까...”
이것이 양명석 씨 자신이 밝히는 축문을 쓰게 된 이유다. 이렇게 주곡리에서 축문을 쓸 마땅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그래도 마을에서 한문을 쓸 줄 알았던 양명석 씨가 이 일을 맡게 되었고 그 일이 어느덧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어오게 된 것이다. 그저 시간이 흘러 어르신들이 자꾸 돌아가시고 연세가 많이 드시니까 힘들어져 대신하게 된 것 뿐이고, 이 일을 하게 된 것이 결코 한자를 많이 알아서도 아니라고 힘껏 스스로를 낮추어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가 자신을 자랑하는 것처럼 느껴져서인지 무척 조심스러워 했다.
이처럼 양명석 씨가 축문을 쓰게 된 계기는 아주 단순했다. 전통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가운데 어깨너머 배운 지식이고 볼품없는 솜씨였지만 마을에 보탬이 되고자하는 작은 실천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인정을 받게 하였고 어느새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계속해서 축문을 쓰게 한 것이다.
그는 “어릴 때 배워 뒀던 게 이렇게 쓸 줄은 몰랐지. 그래도 이렇게 배웠다 써먹으니 선생님이라는 소리도 듣고 좋아.”라고 하시면 환하게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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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석씨
그러나 주곡리 마을도 점점 옛것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형편으로, 현재에도 한문으로 쓰지 말고 한글로 쓰자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양명석 씨는 이런 그들의 생각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쓸 수 있는 동안에는 지금의 모습을 지키고 싶다고 말한다.
당신이 늙어 더 이상 축문을 쓸 수 없게 될 때가 걱정돼 혹 제자를 기르거나 자신의 모자란 능력이라도 물려 줄 사람을 구해야 하지 않겠냐는 질문에 그는 크게 부정하며 말한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뒤를 이을 사람은 나오게 돼 있어 뭘 걱정해. 나도 내가 한다고 해서 한 거 아니자녀. 걱정 안 해.” 그는 꼭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가 다시 이 일을 할 거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 “언제라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이거 하겠다고 하면 줄 거여.”라는 말로 말끝을 흐렸다.
그는 비록 작은 일이지만 자신의 일에 큰 애착을 가지고 마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였고, 그런 그의 마음을 마을 사람들이 인정하여 지금까지 오랜 시간 축문을 쓸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정보 제공자]
양화남(1942년생, 동계 총무)
양명석(1943년생, 새마을지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