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D02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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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안경희 |
서필원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이며 만죽헌 서익의 증손이다. 1614년 서운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는 부친과 조부가 ‘칠서의 옥’으로 인해 유배 중이었던 탓에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칠서의 옥’은 7명의 서얼 출신 인물들이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리려 역모하였다는 사건으로 당시 부여서씨 서양갑이 연루되어 그의 집안이었던 부여서씨들의 삶이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어려운 삶 속에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인조반정으로 서양갑의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 환향하면서 1643년 처음으로 참봉에 제수된다.
그는 평소 성격이 곧고 강직하여 직언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관직에 재임 중이던 때에 인조의 아들이었던 숭선군과 그의 아우 낙선군에 대한 유배가 삼사에서 결의, 인조의 허락까지 받게 된 상황에 있었다.
이에 서필원은 홀로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옛적에 관숙과 채숙이 함께 반란을 도모하였는데 주공이 하나는 베어 죽이고 하나는 석방하였습니다. 이는 우두머리인자를 구별한 것으로 낙선군과 숭선군을 같이 처벌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서필원이 이들의 유배를 반대하자 인조는 서필원은 정직한 인물이라며 하마터면 종실의 일을 크게 그르칠 뻔 했다하고 유배하려던 뜻을 회수하기도 했다. 이렇게 서필원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강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성품 때문에 1652년에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복직되어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일에 힘썼으며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 임금에게 무한한 신뢰를 받기도 하였다. 1671년에는 병이 깊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서도 나랏일을 걱정하는 헛소리를 거듭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민생을 구휼하고 지방의 많은 폐단을 개혁하는 실질적인 사업을 많이 하였으며 직언으로 이름이 나 이상진 등과 함께 오직(五直; 올곧은 다섯 사람)의 한사람으로 칭송받았다. 현재 삼전리에는 그의 인정비(仁政碑)가 남아있는데 지난 1998년 육곡리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원래 전북 익산군 여산면에 있던 것을 1940년 관리가 잘 되지 않자 후손들이 관리가 편한 육곡리로 옮겨온 것이었다. 이후 1998년 부여서씨 후손들은 이 인정비를 다시 삼전리에 종산 서익 선생 비 옆으로 옮겨 관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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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필원 인정비
[정보 제공자]
서승길(1932년생, 육곡2구 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