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D020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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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안경희 |
한국인 중에 홍길동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홍길동전의 모델이 되었던 서양갑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서양갑의 일생은 소설 속 홍길동과 너무도 흡사하며 허균과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란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서양갑은 허균, 이사호, 그리고 김장생의 서제였던 김경손 등과 친분을 쌓으며 지냈으므로 허균이 소설을 집필하며 서양갑의 행적을 많이 반영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양갑은 행림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서익의 서자로 뛰어난 재주와 높은 학문적 소양에도 불구 서자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로 당시 양반의 자식이기는 하나 첩의 자식들인 서자들에게는 관직이나 일반적인 생활에서 양반과 똑같을 순 없다.
1608년 서양갑은 자신과 같은 신분에 있던 심우영ㆍ이준경 등 7인과 연명으로 서자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자격을 달라 상소하였지만 그들의 의견은 무시되었고 이에 격분하여 자신의 집을 짓고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 현액을 걸었다.
이들은 전국을 돌며 화적질을 하게 되었는데 1612년 조령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살해한 사건으로 1613년 모두 체포되었으며 이 단순한 도적사건은 ‘칠서의 옥’이라는 역모사건으로 변모하게 된다.
1613년에 발생한 ‘칠서의 옥’은 단순한 역모나 약탈사건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7인의 서자를 이용하려는 정치적인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당시 이이첨을 중심으로 하는 대북파의 중심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광해군의 지위를 튼튼히 하고자 하는 결정적인 목적으로 박응서를 꾀어 단순 강도사건을 역모사건으로 변모시켜 확대했다. 서양갑은 처음부터 완강히 부인하였으나 자신의 앞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국문 받는 것을 보고 결국 거짓 자백을 함으로써 영창대군은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여서씨들은 큰 위기에 봉착하였고 멸문지화의 지경에 이르렀으나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단순강도사건을 역모로 조작한 것임이 밝혀졌으며, 육곡 서필원의 현달로 연좌되었던 인물들이 신원되면서 새로운 저명 가문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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