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D01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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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
집필자 | 안경희 |
현재의 육곡리는 면소재지의 작은 마을에 불과하지만 전통시대에는 호남에서 서울로 갈 때에 반드시 지나는 큰 길목이었다. 오늘날처럼 여러 갈래 도로가 발달하기 전인 1970년대만 해도 논산, 강경, 대전을 가려면 반드시 육곡리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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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길
이 같은 지리적 환경 덕분에 육곡리는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행정중심지의 역할을 하였고, 독립적인 군현지역으로서 행정체제가 마련될 수 있었다. 백제시대에 육곡리는 지금의 논산시 부창동·취암동·강경읍·연무읍·은진면·가야곡면·채운면 등을 아우르는 덕근현(德近縣)의 행정관청이 있었던 곳이다. 예컨대 지금의 면사무소보다 더 많은 권리와 기능을 가지고 행정과 치안 조세수취 등의 기능을 담당하던 기관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시대부터 시작된 행정 중심의 기능은 통일신라, 고려 때까지도 이어졌으며 조선시대 잠시 은진현으로 편제되어 지금의 은진면 교촌리로 이동하였다가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며 가야곡면이 생기자 육곡리는 다시 가야곡면의 소재지가 되었다. 건양대학교 창업보육센터가 자리한 옛 덕은중학교 뒤편의 넓은 논자리가 백제 덕근골 터라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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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근현치소터
지명과 전설은 덕근골이 덕근현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밝힐 수 있는 문헌이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그 실체를 역사적으로 찾기는 조금 무리가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매우 주목되는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가 나타나 덕근현의 존재를 보여주었다.
백제고분들은 1973년 5월 25일 여술 마을 뒷산 사방공사 도중 발견되어 1986년 공주대학교 박물관 팀에 의해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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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곡리 고분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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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곡리 고분군2
발굴 당시에는 이미 봉토 등은 유실되어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이미 도굴되어 소량의 유물만이 나타나 있어 이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시 마을 사람들도 단순히 ‘고린장’이라고만 알고 있었지 이곳이 이렇게 중요한 백제시대 무덤이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발굴된 13기의 무덤을 조사한 결과 고분의 구조가 백제시대 무덤의 형태인 횡혈식 석실분이었으며, 고분의 구조나 규모가 백제의 왕실묘지식인 횡렬식 단면 6각형이고 은제화형관식 등 각종 장신구들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이 지역이 당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강력한 백제의 왕실이나 귀족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육곡리의 대표 성씨인 부여서씨가 원래 백제 왕실인 부여씨로 왕족의 후손이라고 전해지는 것도 어느 정도 신빙성을 얻는 셈이다.
이렇게 백제시대부터 덕근군으로 독립적인 행정치소를 가지며 중요한 곳으로 주목받았던 육곡리는 통일신라, 고려 때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충청도가 좌ㆍ우도 나뉘며 충청우도의 공주목 은진현에 속하게 되었고 은진현의 행정치소는 현재의 은진면 교촌리로 이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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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면 전경
단순하게 보면 행정 중심이 은진면으로 이동하고 육곡리는 쇠퇴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조선시대 양반 사족들이 행정치소에서 10~20리 떨어진 곳에 집거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당시는 육곡리가 부여서씨 동족마을로서 성장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정보 제공자]
서종선(1924년생, 육곡1구 주민)
송종섭(1925년생, 육곡1구 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