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A0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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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시묘리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홍제연 |
❚ 해방 무렵의 고생담
일제강점기는 그 어느 때보다 고생스러웠다. 일제의 수탈은 사람들의 삶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가장 풍요로워야 할 가을 추수 때에는 일부러 달빛도 없는 한 밤을 틈타 쌀을 짊어지고 옮겼는데 혹시 낮에 들고 다니다가는 뺏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강제적으로 토지측량을 벌였고, 지적도에 소유자 명을 쓰라 하였다. 조선시대의 관습대로 살아온 지주들 중에는 그 필요성을 못 느끼고 이름을 안올렸던 이들이 많았는데 그 틈을 타 남의 땅에 소유주라고 이름을 올렸던 이들이 훗날 실제로 소유권까지 갖게 되어 급작스럽게 부자가 되기도 했다. 영화에서 보듯 일본인 앞잡이가 행세하고 다니거나 칼을 들고 행패 부리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어쨌든 일제의 지독한 수탈 속에서 굶주림은 계속되었다.
일제강점기가 막을 내리고 해방이 되던 그 해에도 시묘리 사람들의 해방맞이는 그다지 밝지 못했다. 해방 직후 이승만 정권의 토지개혁 때에는 특히 지주였던 방씨의 손해가 컸다. 방씨는 조선팔도의 부자 중의 부자라고 하였었는데 이 집의 어른이 하얀 한복 차림으로 뒷짐을 지고 헛기침하며 논밭을 둘러보곤 하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사는 환경이 나빠서 그랬는지 마을에는 가끔 전염병이 돌기도 했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어린이들이 홍역에 걸리는 것이었는데, 논산에 병원이 하나뿐이고 방문하기도 힘들어 홍역은 곧 죽음이라고 생각되었다.
새마을 운동을 거치면서 삶의 질이 높아졌다. 통일벼가 들어와 예전처럼 배고플 일도 없었고, 시골 마을에까지 전기가 들어왔다. 전기가 들어오니 돈 좀 번다는 집에서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사들였다. 누군가의 집에는 미국으로 출가한 딸이 컬러 TV를 친정으로 보내줘 시묘리 사람들은 처음으로 컬러 TV를 보게 되었다. 집 주인이 10원씩 받고 TV를 보여줬는데 매일 온 동네 사람들이 동전을 들고 모여들었다. 부족한 게 많아도 소소한 재미가 있던 시절이었다.
❚ 피난고지
시묘골의 남쪽 전방을 가로지르는 지방도 602호선의 노선은 과거에도 많은 사람이 오가던 길이었다. 옆동네인 올목삼거리는 논산, 연무, 가야곡으로 갈라지는 길목으로 연무읍 토양리의 올목 즉, 조선시대 은진의 역원인 남항원(娚項院)과 바로 이어지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전라도에서 과거시험 보러 한양으로 가는 이들이 지나던 길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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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번 지방도
이러한 교통의 요지였지만, 의외로 한국전쟁을 무사히 지냈다. 논산에서는 ‘피난고지’로 통했던 곳이어서 시내에 살던 사람들이 짐을 싸들고 전쟁을 피해 숨어들었다. 그 무렵 농고를 다니던 최재현(80, 현 노인회장) 씨는 학교 선생님 아홉 분을 동네로 모시고 왔다. 이 시절 피난민들 중에 유난히 시내에 거주하는 기관·단체장들이 많이 들어와서 훗날 이들과 좋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시묘골이 피난고지인 것은 참으로 특이한 경우였다. 보통 피난처는 산 속 깊은 골짜기 마을이거나, 전투현장과 멀리 떨어진 곳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묘골의 마을 앞으로는 큰 길이 지나고, 동네 뒤 골짜기를 지나 바로 인접해 있는 마을에서는 좌우익 갈등으로 참상이 빚어져 시신이 곳곳에 쌓여있다고 할 정도였으며, 가까운 성동면은 충남의 모스크바라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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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1리 전경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주민들이 전쟁기를 무사히 보낸 것은 동족마을의 뿌리 깊은 전통과 홀로 부를 축적해 동네 사람들 부릴 정도로 큰 부자도 없었고 이로 인해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도 없었던 덕분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전쟁 중에 한참 폭격이 심할 때엔 배매산 위의 큰 바위에 올라가 강경과 논산에 엄청난 폭탄이 퍼 부어지는 것을 보기도 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불꽃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을 졸였던 기억이 노인들 기억 속에는 지금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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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매산 전경
당시의 피난민 중에는 강경경찰서장을 지낸 최모 씨가 있었다. 그는 동네에 들어와 머물면서 마침 치복산의 명당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산 아래 샘 위에 묘를 쓰려고 시도했다. 마을에서는 대대로 그 자리에 묘를 쓰면 동네에 큰 해가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던 참이었다. 토박이들 뿐만 아니라 함께 전쟁을 피하고 있던 타 지역 사람들까지 나서서 반대를 했다. 극렬한 반대를 피해 최모 씨는 묘를 산꼭대기에 쓸 수밖에 없었고, 얼마 후 남몰래 이장을 해 마을을 떠나고 말았다.
[정보 제공자]
나재완, (1933년생, 시묘4리 이장)
양운규, (1943년생, 시묘3리 주민)
임승근, (1934년생, 시묘3리 주민)
박영규, (시묘1리 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