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7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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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Burying a Salt Pot of Tabani Village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양촌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필영 |
[개설]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양촌리 탑안이마을에서는 원인을 모른 채 빈번하게 일어나는 화재를 마을 앞산이나 그 부근의 산에서 내뿜는 화기(火氣)에 의한 것으로 여기고, 화산(火山)을 제어하는 수단으로 산에 ‘소금단지’나 ‘간물(바닷물)단지’를 묻는다. 소금단지 묻기는 동제(洞祭)의 일환으로 치러진다. 곧 음력 정월 초사흗날 오후에 제관들은 마을 앞산인 승재골에 올라 화재뱅이의 목적으로 소금단지를 묻는다. 이날 밤 10시경에는 마을 뒤편의 절골에서 산신제를 모신 다음, 이어서 양촌천변에 있는 정자에서 천령제(天靈祭)를 모신다.
[떠나가는 배 형국의 탑 안쪽 마을]
양촌면 남쪽에 위치해 있는 양촌리는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전주군 양량소면(陽良所面)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리(新里)·임하리(林下里)와 고산군 운북면(雲北面)의 하고리(下高里) 일부를 병합하여 양촌리라 하고 논산군 양촌면에 편입하였다. 논산시 연산에서 전라북도 운주로 통하는 국도 697호선을 따라 양촌면소재지에서 1.5㎞ 정도 가면 임화리로 가는 진입로가 나온다. 이 길의 초입에 있는 인내천을 지나 1.5㎞쯤 가면 우측으로 양촌1리 탑안이마을이 있다.
논산시는 전형적인 동고서저의 지형적 특색을 지닌다. 동북부에서 동남부에 이르는 일대는 계룡산지와 대둔산지에 연결되어 험준한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진안고원과 금산고원으로 이어져오는 산맥은 대둔산을 중심으로 두마면·연산면·가야곡면·양촌면 일대의 높은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에 양촌면 양촌리가 자리 잡고 있다.
탑안이마을은 예전에 탑이 있었다 하여 그렇게 불린다. 마을 안에 탑이 1기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외부로 반출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풍수상 형국(形局)은 행주형(行舟形) 지세(地勢)라 한다. 따라서 마을에 노거수(老居樹)가 많으면 무거워서 배가 잘 나가지 않는다고 여긴다. 지금도 마을에 큰 나무가 많아 좋지 않다는 말들을 한다. 집을 새로 지을 때는 배 안에 해당되는 ‘마을 안’보다는 배 바깥쪽으로 여기는 도로 건너편에 짓는다.
한편 마을이 조랭이(조리) 형국이라고도 한다. 조랭이는 쌀을 이는 데 쓰는 기구이다. 이 조리의 입구가 마을 밖을 향하고 있어 마을이 가난하다고도 한다. 조리의 쌀이 마을 바깥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또 마을 뒤편의 국수봉에 있는 큰 바위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좋지 않다고도 한다. 마을 뒤쪽에는 ‘절골’이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절이 있었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 이곳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산제(山祭)를 모신다. 산제를 마치면 곧 이어서 마을 앞을 흐르는 천변(川邊)의 정자(亭子)에서 천령제(天靈祭)를 지낸다.
현재 약 50호가 거주하고 있는데, 이중 하동정씨(河東鄭氏)와 양촌허씨(陽村許氏)가 많은 편이며 나머지는 각성바지이다. 20여 년 전까지는 밭농사를 주로 하였으나 경지정리가 되면서 논농사를 하게 되었다. 밭작물로는 도라지·더덕·고추·깨 등을 재배한다. 딸기 농사도 짓는다. 주로 서울 가락동시장이나 경동시장에 내다 판다. 또한 특산물로는 곶감을 생산하고 있다. 마을에서 생산되는 감만으로는 부족하여, 인근 지역에서 감을 구해온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곶감 산지가 되었다. 1987년에 곶감단지를 조성하였고, 2003년부터는 매년 양촌곶감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국수봉의 화마를 막아내는 소금단지 묻기]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마을 뒤편의 국수봉에 있는 큰 바위가 마을을 불길하게 쳐다보고 있어서 도깨비불을 일으킨다고 한다. 도깨비불이란 원인 모를 화재를 일컫는다. 산신제 제관들은 마을의 화재를 막기 위하여 산제를 모시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 오후에 마을 앞의 ‘승재골’이라 불리는 산에 올라 소금단지를 묻는다. 소금단지란 소금을 넣은 단지를 뜻한다. 여기서 소금은 바다를 상징한다. 산에 소금단지를 묻는 행위는 산을 바다로 치환시킨다. 이러한 해양 세계는 능히 불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제관 일행이 ‘승재골’ 정상에 오르면 먼저 소금단지를 묻어놓은 장소를 찾는다. 여기에는 보통 돌이나 나무를 쌓아올려 표식을 해놓기 때문에 금세 알 수 있다. 소금단지 안에는 한 되 분량의 소금을 넣어준다. 간혹 단지가 깨져 있으면 새것으로 교환해 묻어준다. 소금단지 뚜껑을 열었을 때 전 해에 넣어둔 소금이 녹아서 없어졌으면 길(吉)하다고 여긴다. 만일 소금이 녹지 않았으면 불길(不吉)한 징조로 생각한다. 소금을 묻은 제관 일행은 마을로 내려와 산신제와 천령제를 지낼 준비를 한다.
[마을의 안녕과 화평을 기원하는 산신제]
산신제는 ‘절골’이라고 불리는 마을 뒤편의 산에서 지낸다. 과거에 절이 있었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 산제당은 깊은 골짜기에 있어 마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산제당에 올라가면 마을이 환하게 잘 내려다보인다. 산제당은 돌탑과 참나무로 구성되어 있다. 돌탑은 잡석(雜石)으로 120㎝ 정도로 쌓아올린 원뿔형 모습이다. 마을 사람들은 평소에는 산제당에 잘 올라가지 않는다. 산제당 근처에만 가도 두렵고 꺼리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제관(祭官)들조차 금기를 잘 지키고 정성을 들였으면 산제 모시러 당(堂)에 올라가도 마음이 편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공연히 꺼림칙하게 여긴다.
제관 두 명은 마을 이장이나 노인회장 등이 선정한다. 한 명은 산제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주관하며, 다른 한 명은 보조 역할을 한다. 제관은 책력(冊曆)을 보아 운(運)이 닿고 집안에 젊은 여자가 없는 사람으로 한다. 근래에는 동민(洞民) 누구나 제관을 맡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산신제를 지내고 나면 그 보답으로 수고료를 주기까지 한다. 제관들 이외에 ‘제물을 마련하는 집’을 별도로 선정한다. 설을 쇠고 ‘제물을 마련하는 집’의 삽짝에 황토를 피우고 금줄을 드리운다. 금줄에는 흰 종이를 잘라서 만든 길지(吉紙)를 끼운다. 황토는 사립문 양쪽으로 세 무더기씩 놓는다. 마을에서 초사흘 안에 초상이 나면 산신제를 지내지 않고, 3일 후에 부정이 가시면 다시 택일한다. ‘산 부정’ 곧 아이가 태어난 부정은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제물은 음력 섣달그믐에 미리 구입해놓는다. 마을에서 5리 정도 떨어져 있는 양촌장(2·7일)을 이용한다. 산신제 제물이기에 가게 주인들도 미리 헤아려서 가장 좋은 물건들만 골라서 준다. 제수(祭需) 값은 흥정하지 않는다. 제물로는 밤·대추·곶감·통명태·떡·술 등을 마련한다. 떡은 백설기를 하는데, 쌀 세 되 정도의 분량으로 쪄낸다. 통명태의 눈은 온전해야 한다. 천령제 지내는 제물도 따로 마련하는데, 이때에는 돼지머리가 추가된다.
제기(祭器)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구매하여 마련해놓은 것을 사용한다. 평소에 제기는 ‘제물을 마련하는 집’이나 ‘이장 집’에서 보관한다. 제비(祭費)는 마을 기금으로 충당한다. 오래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풍물을 치면서 걸립(乞粒)을 다녔다. 모든 집을 다 다녀야 했기 때문에 2~3일 정도 소요되었다. 풍물패가 마당으로 들어가 부엌·장광·샘에서 풍물을 치면, 집주인은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제비를 성의껏 냈다. 그러면 풍물패는 집의 터를 눌러주는 ‘지신밟기’를 행했다. 이렇게 터를 눌러주는 것은 가을에 안택을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걸립은 약 30여 년 전에 중단되었다.
산제 당일에 제관들은 산제당 오르는 길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그리고 금줄도 드리워둔다. 산제당 옆에는 ‘약물’이라 부르는 샘이 하나 있다. 부정한 음식을 먹고 이 절골 샘물을 마시면 두드러기가 생긴다. 한여름에 땀띠가 있을 때 그 물로 씻으면 낳는다. 밤 10시 경이 되면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서 제관들은 제당(祭堂)에 오른다. 먼저 제물을 진설하고, 분향(焚香)·헌작(獻爵)·재배(再拜)를 한다.
이어서 독축(讀祝)을 하고 재배한 후에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산신소지부터 먼저 올린다. 그리고 마을소지, 제관소지, 대주소지를 올린다. 집집마다 소지를 올려주기 때문에 12시 정도가 되어야 산신제가 끝난다. 제관 일행은 음복을 하고 제물을 조금 떼어놓고 하산한다. 제관이 내려가면 산제당 주변에 숨어 있던 아이들이 제물을 주워 먹는다. 산신께 올렸던 제물을 먹으면 복이 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서 모시는 하당제로서의 천령제]
천령제는 마을 앞을 흐르는 양촌천 옆에 있는 정자(亭子) 앞에서 지낸다. 그 이전에는 이곳에 있던 느티나무에서 천령제를 지냈다. 일종의 하당제(下堂祭) 의미를 지닌 신목제(神木祭)였던 것 같다. 이곳은 마을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공터이다. 동민들은 여기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풍물을 치면서 제관 일행을 기다린다. 산에는 제관 일행만 올라가지만 천령제를 지내는 곳에는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한다. 근래에는 마을 사람들이 관심이 적어 참여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산에서 내려온 제관 일행은 제물을 가지고 마을 정자가 있는 곳으로 간다. 돗자리를 깔고 제물을 진설한다. 산신제와 같은 방식과 절차로 천령제를 행한다. 제의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음복(飮福)을 한다. 다음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은 마을회관으로 모인다. 산신제와 천령제 결산을 포함한 마을의 여러 현안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회의를 한다.
[인근 마을들의 소금단지 묻기 풍습]
탑안이마을과 인접해 있는 양촌2리, 임화4리, 신기리에도 소금단지를 묻는 풍습이 있다. 이들 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소금단지를 함께 묻는다.
1. 양촌2리의 소금단지 묻기
양촌과 평촌은 양촌천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마을이다. 두 마을 사람들도 한 마을로 생각하고 있다. 빼재골과 댓뱅이골 사이에 있는 노루목은 화기를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노루목은 마을로 뻗어 나오는 형국인데, 이 때문에 마을에는 불이 잘 나고 좋지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노루목의 화기를 방어하기 위해 양촌천 옆으로 느티나무를 여러 그루 심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마을의 어른들과 지관(地官)의 의견에 따라 노루목에 소금단지를 묻어 화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제어하기 시작하였다.
열나흗날 저녁이 되면 부정하지 않은 사람 두세 명이 노루목으로 올라간다. 이때 한 되 분량의 소금을 가지고 간다. 노루목 정상에 올라가 소금단지의 뚜껑을 열고 소금을 넣는다. 소금이 조금씩 녹아 노루목의 화기를 눌러준다고 한다. 이를 ‘화산맥이’라고도 한다. 화산을 막는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소금단지를 묻고 밤이 되면 산신제와 천령제를 지냈다. 그러나 근래에는 산신제와 천령제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지내고, 열나흗날에는 소금단지만 묻는다.
산신제는 마을 뒷산의 정상 부근에서 지낸다. 평소에는 산제당에 올라가지 않으며 그 주변에는 묘도 쓰지 않는다. 부녀자들이 개인적으로 정성을 드리는 사람도 있다. 제관은 마을에서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한다. 제관은 사흘 동안 근신을 한다. 이때에 마을에 흐르는 천(川)의 얼음을 깨고 목욕재계를 한다. 눈이 많이 쌓인 산제당 길을 제물을 지게에 지고 오르내려도 산신님이 떠받들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제비는 소지를 올리는 사람들이 내는 비용인 ‘소지돈’으로 충당한다. 제물은 제의 당일에 장에서 구입해온다. 지금도 산신제 제물이라고 하면 상점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내준다. 제관 일행은 제일(祭日) 오후에 제당으로 올라가 길을 내고 청소를 해놓는다. 정월이기 때문에 정성을 드릴 때 추위를 덜기 위해서 나무도 해놓는다. 저녁이 되면 제관은 산제당 초입의 ‘터골’로 올라간다. 여기에 보관되어 있던 제기(祭器)를 깨끗하게 닦고 떡도 찐다.
산제당에는 돗자리를 펴고, 그 위에 문종이를 깔고 떡·명태·밤·대추·곶감·술 등의 제물을 진설한다. 제관이 술을 올리고 재배한 후 독축한다. 그런 다음 소지를 올려준다. 소지는 산신소지, 대주 소지를 올린 후 학생이나 군인소지를 특별히 올려준다. 산신제가 끝나면 제관은 간단하게 음복을 하고 마을로 내려온다. 산신제를 마친 제관은 제물을 가지고 느티나무가 있는 곳으로 간다. 느티나무 앞에 제물을 진설하고 천령제를 지낸다. 이때는 마을 사람들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2. 임화2리의 소금단지 묻기
임화2리 고산임화마을에서도 남당산에 소금단지를 묻는다. 이러한 풍습은 마을이 생긴 이래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마을 앞에 있는 산들의 양쪽 봉우리 사이로 남당산이 보인다. 이렇게 산을 넘어서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남당산은 화산으로 여겨진다. 화산은 마을에 불을 일으키는 진원지(震源地)이다. 음력 정월 열나흗날 오후에 마을 사람들은 큰개말골을 따라 산에 오른다. 정상 부근에 여러 개의 판석(板石)을 깔아놓은 곳이 있다. 여기에 소금을 뿌려놓고 그 위에 땔나무를 얹은 다음 불을 지핀다. 이렇게 불을 지르면 화기를 미연에 방지하는 효험이 있다고 한다. 이 마을도 40여 년 전에는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산 정상 부근에 소금을 직접 묻었다.
밤이 깊어지면 마을 사람들은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앞산으로 간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산의 정상에 있는 소나무를 신체(神體)로 삼고 산신제를 올렸다. 그러나 소나무가 해충에 의해 죽고 말았다. 그래도 동민들은 이곳을 제장(祭場)으로 여기고 여기에서 산신제를 모신다. 산신제를 마치면 마을로 내려와 느티나무 앞에서 천령제를 지낸다. 과거에는 산신제를 지내는 제관들을 선출하였지만, 근래에는 이장과 반장이 당연직으로 맡고, 다만 제물을 준비하는 집만 별도로 선정한다. 이때에 경도(經度)를 하는 부인이 있는 집은 피한다. 따라서 폐경(閉經)을 한 나이 많은 부인이 있는 집을 고른다.
제물을 준비하는 집에서는 산신제 사흘 전에 삽짝에 금줄을 드리운다. 이 기간에는 일체의 부정(不淨)을 피한다. 만일 집안에 초상이 있어도 문상(問喪)은 다른 식구가 해야 한다. 마을에 부정이 발생하면 그 해에는 산신제를 지내지 않으며 소금단지도 묻지 않는다. 그러나 출산은 큰 부정으로 여기지 않아서 산가(産家)에만 가지 않고 산신제는 그대로 지낸다.
제비는 각 호당 약 1만 원씩 추렴한다. 제물로는 시루떡, 소고기 산적이나 돼지머리, 술, 삼색실과, 통명태 등을 마련한다. 제사 당일 오후에 제관 일행은 산제당으로 올라간다. 산으로 올라가면서 풀을 베어 길을 내고 제당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밤에 추위를 피하기 위해 불을 피울 나무도 해다 놓는다. 제관 일행은 앞산으로 가서 소금단지를 묻은 다음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밤 10시가 넘으면 제관 일행과 마을 사람들이 풍물을 치면서 산의 입구까지 동행한다. 산에는 제관 일행만 올라가 먼저 불을 피운다.
마을 사람들은 산에 오르지 않고, 제관과 헤어져 느티나무가 있는 곳으로 간다. 이곳 제장에 흰 종이를 깔고 제물을 진설한다. 제관이 술을 올리고 재배한다. 축문을 읽은 뒤에 소지를 올려준다. 소지는 되도록 모닥불 위에서 올린다. 이렇게 해야 소지가 하늘로 잘 올라가며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소지까지 올리면 제관들은 간단하게 음복을 하고 내려온다. 과거에는 첫닭이 울어야 제관이 내려올 수 있었다. 제관들이 하산할 즈음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산 밑으로 제관들 마중을 나간다.
제관들이 내려오면 풍물패와 함께 마을의 느티나무로 간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마을회관 앞에는 느티나무 고목(古木) 두 그루가 있다. 수고(樹高)는 약 20m이고 둘레는 3.7m 정도가 된다. 아주 오래된 나무로, 정확한 수령(樹齡)은 알지 못한다. 봄에는 잎이 피는 모양새를 보고 한 해의 풍흉을 점치는데, “잎이 몰쭉[한 번에] 피면 시절이 좋고, 층을 나누어서 피면 시절이 좋지 않으려나 보다.”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제물을 진설하고 천령제를 지낸다.
3. 신기리의 소금단지 묻기
양촌면 신기리 늘마루마을에서도 소금단지를 묻고 있다. 신기리 뒤편에 있는 산은 오래 전부터 화산이라고 불린다. 이 때문에 마을에는 간혹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났다. 언젠가 어느 도승(道僧)이 마을의 화재를 방비할 대책을 일러주었다. 곧 매년 음력 정초에 산과 마을의 경계가 되는 곳에 간수를 채운 항아리를 묻으면 화재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의 산신제를 모실 때에 이곳에 간수단지를 묻는다. 또 일 년 동안 부정하지 않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끔 간수단지를 열어보도록 한다. 간수가 넉넉하게 채워져 있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만일 간수가 메말라 있으면 이 마을과 인근의 괸돌마을에 화재가 발생한다고 예측한다.
괸돌마을에서는 늘마루마을의 간수단지 묻기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괸돌마을 독자적으로 소금단지 묻기도 하지 않는다. 늘마루마을에서는 산제를 지내기 전에 마을 사람들이 풍물을 치면서 제당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온다. 산제를 올린다고 산신에게 고하는 동민의 인사이다. 밤이 깊어지면 제관들만 산에 올라 산제를 모신다. 산제 다음 날에는 마을 사람들 모두 제관 집에 모여 음복하고, 결산을 마친 후 다음해 제관을 선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