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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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銅里忠奴碑 |
영어의미역 | Monument of Devoted Servants in Cheongdong-ri |
이칭/별칭 | 충노 영상·귀상 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 청동골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성진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 청동골에 있는 조선 후기 영상과 귀상의 충노비.
[건립경위]
연산현 사람 이민진(李敏進)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죽기를 각오하고 검은색 버선과 행전을 차고 남한산성으로 의병을 이끌고 갔다. 남한산성 근처 광주 험천에 이르러 왜적의 저지를 받아 치열한 전투 끝에 이민진은 장렬히 전사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동행했던 노비 영상(永上)과 귀상(貴上)은 많은 전사자들 중에서 검은색 버선과 행전을 찬 주인을 발견하고 그 시신을 고향까지 모셔와 장사를 지냈다. 조정에서 이민진에게는 충신 정려가 내려졌으나 노비들에게는 아무런 포상이 없자, 이민진의 가문에서 그들의 충직함을 기리기 위해 1853년(철종 4) 청동리 충노비를 세워 주었다.
[위치]
청동리 충노비는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 청동골 가평이씨 묘역 내 이민진의 묘소와 정려각 앞쪽 남측에 자리하고 있다.
[형태]
비의 석질은 화강암이며, 귀접이 형태로 북향하고 있다. 비의 높이는 108㎝, 폭은 44㎝, 두께는 16㎝이다. 글자의 크기는 2.7㎝이다.
[금석문]
비의 전면에 ‘충노영상귀상지비(忠奴永上貴上之碑)’라고 쓰여 있고, 비의 좌우면과 후면에 모두 글씨가 새겨져 있으나 현재는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금석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강오륜은 천도의 불변 법칙이요, 인륜의 큰 것이요, 또 종과 주인의 의가 있으니, 주인은 은혜롭고 종은 의로워야 한다. 종이 주인 섬기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같이 하여야 하니, 아아! 이는 비록 삼강오륜에는 들어가 있지 않으나 의리는 한가지이다. 충과 효와 열은 세상에 혹 있거니와 충노에 있어서는 예부터 드물게 있는데, 어찌 내 선조 백봉공의 종 영상과 귀상 두 사람이 그 주인에게 충성한 것과 같은 일이 있겠는가.
백봉공이 나이 29세 때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의 수레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백면서생으로 의병을 일으켜 고을 원님 김홍익과 함께 적진에서 순절하였다. 그 때 공을 수행했던 두 종이 그 주인이 적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 적진에 달려들어 공의 행전과 버선이 검정색으로 남다르게 착용한 것을 근거로 쌓인 시체 속에서 찾아내어, 그대로 연산으로 모셔와 공의 선영에 장사하였으니, 아 슬프도다!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 할아버지 체혼을 어찌 장사 지낼 수 있었겠는가.
영중추부사 조공의 묘갈명에 찬하여 가로되, “필부로서 나라 일에 진력함은 의요, 서생으로 출전함은 용이요, 검은 행전으로 남다르게 착용하여 죽을 것을 스스로 맹세함은 정이요, 시퍼런 칼로 서로 치고 싸우되 물러서지 않음은 열이다. 이 네 가지를 갖추었으니, 족히 백세 동안 힘써 높이겠으며, 그가 사람을 감화시켜서 종도 그 힘을 다 하게 하였다. 정려기를 지었는데, 거기에 공은 충신이어서 화려하게 정려를 세웠으나 충노의 충성을 그 곁에 표함이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더구나 공의 후손된 자가 어찌 같은 마음의 의리가 없겠는가. 이제 간단한 비석에 충성을 표하여 공의 정려 곁에 세우고, 세세토록 잊지 않게 하리라. 명하여 가로되, 신하는 왕에게 충성하고, 종은 그 주인에게 충성하였으니, 옛 병자년에 북쪽 오랑캐 두목이 병란을 일으켜, 국운이 상서롭지 못하여 임금이 파천하니, 광주 남한산성 백성들이 화합하고, 충청 서호의 선비들은 의롭게 일어나니, 연산 황산의 현감과 청동의 서생 백봉이 의병 삼천을 모집하고, 이를 따르는 두 사람의 종도 있었다.
섣달 찬 눈이 온 산을 덮고, 새벽안개가 험천에 끼어, 피비린내 나는 먼지가 어지럽게 일어나고, 시퍼런 칼날이 번득이고 천지는 어둡고 캄캄한데, 원님과 공이 함께 살해되니, 슬프도다. 이들에겐 주인을 잃은 곳이로다. 두 사람이 말하기를, 주인이 이미 죽었으니, 종은 장차 어디로 가야하는가 하고 적진에 들어가 공의 시신을 거두어서 나오니, 얼굴은 생시와 같고, 검은 행전은 그대로 치고 있었다.
대의가 당당하여 일월같이 빛나리니, 고향에는 붉은 정려가 있고, 묘소에는 백양나무가 무성하도다. 오호라.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 할아버지를 어떻게 장사 지냈겠는가. 바람 앞에 억센 풀이요, 눈 속에 우뚝 선 소나무 같도다. 주인에겐 이미 정려가 내려져 임금의 은혜가 한량없으나 종은 아직도 그 충정을 나타내지 못했으니, 우리 허물을 어찌 할까.
슬프도다! 이 늙고 용렬한 사람이 의논된 것을 모아, 경비를 마련하고 비석을 다듬어 그 공덕을 새겨 칭송하나, 여기에 만분의 일만 기록하였을 뿐이다. 모든 사람이 의금을 내고 모인 사람들이 공덕을 칭송하도다. 주인의 정려는 화려하고, 종의 비석은 그 곁에 섰구나. 뜰엔 삼공, 백관이 가득 차고, 선영에는 공신들의 묘소로 이루어졌도다.
(夫三綱五品天道之常人倫之大者又有奴主之義主恩奴義故奴事主如臣事君主使奴如父使者嗚呼此雖逸於三綱五品其義一也盖忠孝烈世惑有之至若忠奴自古罕有而豈有如吾先祖白峯公之奴子永上貴上二人之忠其主者乎吾先公年方卄九當丙子虜難聞
乘輿播遷南漢以白衣倡義與知縣金忠愍公諱弘翼同時殉節於賊陣其時隨奴斯二人見其主死於賊遂控馬馳入賊圍以公之縢襪黑色表異求之積尸中因返于連山襄奉於公之先兆下噫微斯二人寧有吾祖之葬魄乎領樞趙公寅永撰公之墓碣銘曰匹夫而勤 王義也書生而從戎勇也黑縢殊製死以自誓貞也白刃交下戰不旋踵烈也四者備矣亦足以風厲百世其感於人也奴能竭其力亞銓兪星煥撰公之旌閭記中有曰公之忠臣之旌煥焉有閭則不以忠奴之旌旌之於其側其可乎余以此竊有所恨者云尤況爲公之裔者豈無興歎之義哉今以尺石表忠立於公之旌閭之側爲世世不忘焉銘曰
臣忠於君奴忠於主 奧輿南漢虜酋搆禍 國運不祥播遷 乘輿 南漢民和西湖士義 黃城朱紱靑洞白衣 募士三千隨奴一二 沒岳臘雪險川曉霧 腥塵紛起白刃交下 天地晦冥城化亻具害 吁此人兮失主之處 曰 主旣決死奴將何去 馳入賊圍收出公屍 白面如生黑縢尙存 大義堂堂日月不泯 故山丹旌先墓白楊 鳴呼 微斯二人我祖誰葬 風前勁草雪裏孤松 主其棹楔天恩罔涯 奴未旌忠我咎何居 哀此殘劣收議鳩財 勒石頌功記玆萬一 諸員出義滿座頌德 主閭煥然奴碑側焉 槐蔭滿庭松梓成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