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5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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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來修 |
영어음역 | Yi Naesu |
이칭/별칭 | 양은(陽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416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이시경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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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416 |
성별 | 남 |
생년 | 1860년 8월 22일 |
몰년 | 1933년 12월 23일 |
[정의]
일제강점기 논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이내수는 1860년 8월 22일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416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홍주(洪州) 지역의 민종식(閔宗植) 의진(義陣)에 참가하여 국권회복운동에 힘을 쏟았으며, 1916년 7월에는 이내수 자신의 집에서 홍주 의진 출신인 이용규(李容珪)·이만직(李晩稙)·윤병일(尹炳日)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곳곳의 동지를 규합하면서 자금을 모집하였으나, 이내수 등의 계획은 배신자의 밀고로 사전 발각되면서 실패하였으며, 1917년 4월 체포되어 전라남도 기자도(箕子島)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그 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용규 등과 함께 국민대회를 추진하였으며, 한편 곽종석(郭鍾錫)·김복한(金福漢) 등의 유림 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독립을 청원한 파리장서(巴里長書) 137인의 유림 대표 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또한, 3·1운동 직후 서울에서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결성한 대동단의 유림단 대표로 추대되었다.
대동단에서는 당시 사회 각층을 황족·진신·유림·종교·교육·상공·노동·청년·군인·부인·지역구역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들 각층의 인사들을 대상으로 포섭 활동을 전개했다. 1919년 11월 말 대동단이 발각되면서 이내수는 일제의 포위망을 피해 1921년 5월부터는 논산 지역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논산 지역을 거점으로 동지를 포섭하고 2천여 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 조달하는 등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3년 8월 1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내수는 1933년 12월 23일 73세로 별세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고, 1990년에는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