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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1560
한자 尹履炳
영어음역 Yun Ibyeong
이칭/별칭 계성(繼聖),성제(省齊)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시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면 병사리
성별
생년 1885년연표보기
몰년 1919년연표보기
대표경력 독립의군부 단원

[정의]

일제강점기 논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윤이병은 1885년 11월 1일 현재의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 영선사주사(營繕司主事)로 있을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여러 차례 복수토역소(復讐討逆疏)를 올렸다. 한편 고종의 밀령을 받아 명성황후 시해의 진상을 조사 보고하고 정부 내의 친일세력을 숙청하려다 실패했다. 1903년 5월에는 청국(淸國) 동순태(同順泰)의 상표(商票)와 일본제일은행권(日本第一銀行卷)의 국내유통을 반대하는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의 위협으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을 때는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장하는 격문을 전국에 살포하였다.

1906년에는 향리에서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를 창립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힘썼다. 1907년 헤이그 밀사를 구실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일본의 차관통치를 시작하려고 하자 동우회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연합하여 격렬한 반대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을사오적 처단과 이완용(李完用) 집에 방화를 제의하여 이를 소각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3년간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유배당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1913년 9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활동 중 1914년 4월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19년 3·1운동 때에는 서울 적선동(積善洞)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3월 상순에 한남주(韓南珠) 등과 13도 대표로 국민대회(國民大會)의 결의를 지지하고 한성정부안에 의거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며 선전하는 데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1월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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