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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농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1406
한자 日本人農場
영어의미역 Farms Possessd by Janpanese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은지

[정의]

1905년 이후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일본인들이 소유한 농장.

[개설]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불하정책에 의해 전국적으로 급속히 증가하였다.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일본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농토를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국에 걸쳐 많은 농장을 조성할 수 있었다. 1909년 6월 전국적으로 있었던 일본인 지주는 총 692명이었고, 소유 면적은 52,426정보, 지주 1인당 소유 면적은 75.8정보였다. 당시 30정보 이상을 소유한 일본인 지주는 135명이었는데 그 중 85명이 100정보 이상의 대지주였다고 하니 대지주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배경]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5년 일본인 6~7명이 연산군 서면에 위치한 마구평을 불법적으로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마구평은 원래 양전(良田)이었지만, 한해(旱害)와 수해(水害)로 인해 경작을 하지 못하여 놀리던 땅이었다. 주민들은 일본인들이 이러한 유휴지를 임의로 개간하여 정착하자 크게 반발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를 대표한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은 일본인들이 임의로 전토를 개간하여 정착하는 것은 조약 위반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일본인들의 즉시 철수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마구평은 원래 마을 주민들의 공동 소유지가 아니라 궁내부 주사 유창렬이 궁내부에서 매각한 토지를 개인 자격으로 구매한 땅이며, 유창렬과 일본인이 그 일대에 제방을 축조하여 수해를 예방하고 주변 땅을 개간하는 계약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마구평 개간은 합법적인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인들에 의한 토지 개간은 조상 대대로 마을 공유지로 여겨왔던 토지 소유권에 대한 명백한 침해 행위였다.

마구평 지역 주민들의 격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통감부를 장악한 일본 정부의 옹호 조치에 의해 일본인 주도하에 개간사업이 진행되었다. 통감부는 개간사업에 보조비 3만 5천 원을 지원했으며, 공주의 재무감독국에서 이를 감독하였다. 개간사업이 완료됨에 따라 약 2,578,524㎡에 달하는 막대한 경지가 새로 생겨났다. 이러한 마구평 개간을 계기로 논산 지역에 일본인 농장 진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변천]

논산은 상업 중심지라는 특성 이외에도 농업지로서 주목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일본인 소유의 농장이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1909년경 논산평야에서 생산되는 주요 생산물은 쌀과 잡곡이었는데, 1년 생산량은 쌀 10만 석, 콩 2만 석, 보리 5천 석, 깨 4천 석이었다. 이중 절반 이상은 논산에 집산된 후 군산을 거쳐 쌀은 일본에 수출되었고, 잡곡은 군산에서 다시 전국으로 유통되었다. 일찍이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이처럼 농업 환경이 우수한 논산 지역에 일본인 농민 300명을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1909년 당시 논산 지역에 설치된 일본인 농장은 다천농장·판상농장·황권농장·말영농장·소림농장·영진농장 등 6개였다. 이외에도 익산에 본부를 둔 등본농업도 은진·석성·노성·임천·옥구·여산·익산·임피 등지에 농토를 소유하여 농업을 경영하였다. 당시 등본농업은 토지 소유 규모가 총 914정보에 달하는 전국 최대 규모의 농림회사였다. 이외에도 토좌권업합자회사 강경지점은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논산 지역 농지 개간과 조림사업을 담당하였다.

[지가]

1909년경 대한제국 농상공부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논산 지역의 논은 상등이 991.74㎡당 62원, 중등 37원, 하등 15원이었다. 여산, 노성, 석성, 부여, 용안 등지의 경우 상등 논은 25원 내지 37원이었다. 반면 밭의 경우는 지역에 따라 조금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상등은 12원, 하등은 5원 정도였다. 택지는 3.3㎡당 최고 5원, 최저 2원이었고, 택지 부근의 경지는 한 마지기당 최고 20원에서 최저 3원 정도였으며, 평균 11원에서 12원 사이로 파악되고 있다.

1910년 강경의 일본인회에 의해 조사된 논산 지역의 지가와 소작료를 살펴보면, 991.74㎡당 논은 62원에서 25원 사이였으며, 밭은 50원에서 5원 사이였다. 또한 991.74㎡당 생산량은 논은 5석에서 2석 사이였고, 소작료는 2석에서 0.6석으로 소작료율은 대체로 40% 내외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밭의 경우는 991.74㎡당 생산량은 콩 1.5석에서 0.6석이었고, 소작료는 0.5석에서 0.2석 사이였다. 밭의 경우 소작료율은 정확히 1/3이었다.

이는 밭의 경우 대부분 정액지대인 도조법에 의해 소작료가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비하면 논의 경우 소작료율은 높은 편이었다. 특히 논산 지역에서 생산된 미곡은 대부분 군산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되었기 때문에 미곡 상품화율이 매우 높았다. 미곡 상품의 유리한 조건을 배경으로 일본인들은 다투어 논산 지역에 농장을 설치하였고, 농업 경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논산 지역에서 생산된 미곡 대부분이 일본으로 유출되었기 때문에 논산 지역의 미곡가는 항상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1901년 흉년으로 인해 미곡가가 급등하자 은진군에서는 은진에서 생산된 미곡을 외부로 방출하지 못하도록 방곡령을 발령하여 일본 상인이 매집한 쌀과 콩 등 1,600여 석을 압류하기도 하였다. 은진군수가 내린 방곡령은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강력한 항의로 곧바로 철회되긴 했지만, 일본 농장의 침투와 미곡 유출이 논산 지역의 농민들에게 미친 영향력을 짐작케 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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