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2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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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熹 |
영어음역 | Gim Hui |
이칭/별칭 | 선지(善之),근와(芹窩),효간(孝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수연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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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
성별 | 남 |
생년 | 1729년 |
몰년 | 1800년 |
본관 | 광산 |
대표관직 | 우의정|영중추부사 |
[정의]
조선 후기 논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 자는 선지(善之), 호는 근와(芹窩). 사계 김장생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수택(金壽澤)이다. 아버지는 김상경(金相庚)이며, 어머니는 이광택(李光澤)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희는 1762년(영조 38)에 생원이 되고 음보(蔭補)로 봉사가 되었다. 1773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77년(정조 1)에 초계어사에 선발되었다. 1779년 교리가 되어 사대부들 중에 공물과 경저인(京邸人)이 내놓은 물건을 몰래 팔아서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엄금하게 하되 만약 재상가라 하더라도 용납하지 말고 장오리(贓汚吏)의 율을 적용시킬 것을 상소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1780년에는 대사간과 대사성 등을 거쳐 강원도관찰사, 홍문관부제학, 광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790년에는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예조판서와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서흥부사를 역임하였다. 1791년에는 임경업(林慶業)의 실기(實記)를 찬집하였고, 이조참판과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1793년에 우의정에 올랐지만,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다툼 속에 인물을 천거한 것이 문제가 되어 물러났다. 그 후 다시 판중추부사를 거쳐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795년과 1797년에 동지겸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학문과 사상]
김희는 경학에 능통하여 경전의 장구에 대해 정조에게 많은 조언을 하였으며, 정조의 개혁 정치를 도왔다. 청백한 인품을 가졌으며, 사관들은 한사(寒士)와 같이 담소한다고 평하였다.
[저술 및 작품]
편서(編書)에 『사계연보(沙溪年譜)』가 있다.
[묘소]
묘소는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에 있으며, 논산시 향토유적 제2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