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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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益熙 |
영어음역 | Gim Ikhui |
이칭/별칭 | 중문(仲文),창주(滄州),문정(文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고수연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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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
성별 | 남 |
생년 | 1610년 |
몰년 | 1656년 |
본관 | 광산 |
대표관직 | 대제학 |
[정의]
조선 중기 논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문(仲文), 호는 창주(滄州). 할아버지는 김장생(金長生)이고, 아버지는 김반(金槃)이다. 어머니는 서주(徐澍)의 딸로서 연안서씨(延安徐氏)이다. 동생은 김익겸(金益兼)이다.
[활동사항]
김익희는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정자에 등용되었다. 그 해 검열을 거쳐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635년 수찬과 사서를 거쳐,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론자로서 청(淸)과의 화평을 반대하였다. 후에 왕을 남한산성에 모시고 가서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었다. 1637년 교리·집의를 거쳐 1639년 이조좌랑이 되었고 1642년 사간이 되었다.
1653년 부제학 재직 시 오랫동안 버려 두었던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제사 드릴 것을 주장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이듬해 사학(四學)의 교수(敎授) 각 1인을 겸교수(兼敎授)로 고치고 시종(侍從)이 겸직하도록 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1655년 대사성·대사헌이 되고, 이듬해에 대제학이 되었다.
[저술 및 작품]
김익희의 손자 김진옥(金鎭玉)이 1708년(숙종 34) 간행한 문집 『창주유고(滄州遺稿)』가 있다.
[묘소]
김익희와 처의 묘소가 대전광역시 유성구 가정동 산 8-9[대덕대로 507-150]에 있다. 묘소는 광산김씨 창주공파(光山金氏 滄州公派)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