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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당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850
한자 養性堂記
영어의미역 Yangseongdang Pavilion Record
이칭/별칭 「양성당기문」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병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문
작가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창작연도/발표연도 1602년연표보기

[정의]

1602년 김장생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건립된 양성당을 기념하여 지은 기문.

[개설]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는 김장생(金長生)의 아버지인 김계휘(金繼輝)가 건립한 경회당(慶會堂)이 있어 당시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었다. 김장생은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낙향한 뒤에, 경회당 인근에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1634년(인조 12)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양성당과 경회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건립하였다.

1660년(현종 1) 서원은 ‘돈암(遯巖)’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이에 따라 현재 양성당돈암서원 내에 위치하게 되었다. 「양성당기(養性堂記)」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아한정(雅閑亭) 터에 김장생이 건립한 양성당에 대한 기문으로, 유고집인 『사계선생유고(沙溪先生遺稿)』권5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돈암(遯巖) 원림(園林) 안에는 옛날 정자가 있었는데 현판을 아한(雅閑)이라 하였다. 우리 세조조의 문사 최청강(崔淸江)의 별장이라. 뒤에 우리 백조부인 서윤(庶尹) 김석(金錫)이란 분이 얻은 것인데 내가 그곳에 집을 지었다. 뒤에 조그만 산이 있는데 산기슭에 소나무와 대나무가 있고 앞에 긴 수풀이 있으며 그 바깥에 맑은 시내가 있어 흰 모래가 아름답고 고우며 깊이가 배를 띄울 만 하였다. 또 뒤의 산골물이 바위 사이에서 떨어지며 흘러 갓을 씻을 만하다.

이끌어 위아래로 연못을 만들고자 붉은 연과 흰 연을 심었다. 또 도화꽃 핀 계곡길과 버드나무 물가가 있으며 사초(莎草)가 둑에 피어 있는 것이 수백 보쯤 된다. 배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밤나무, 닥나무, 옻나무, 뽕나무, 산뽕나무가 좌우로 둘러져 있으며 그 먼 기세로는 대둔산이 그 남쪽에 있고 계룡산이 그 북쪽에 솟아 있는 봉우리들이 험준하나 한 자리에 다 모인다.

교외에 메마른 밭이 몇 이랑 있어 이에 하인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부지런히 힘써 죽을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내가 서울에서 나고 자라 조정에서 관직에 매여서 속세의 번거로운 일에 골몰하느라 하루도 정양(靜養)하는 공이 없으므로 허물과 후회가 산처럼 쌓여 있고 머리를 돌림이 아득하니 가히 세월로 구원하고 다스릴 수 있음이 아니다.

이에 벼슬에 오르기 전의 옷을 찾아 우러러 산을 즐기고 몸을 굽혀 사물에 촉발하여 이치를 깨달아 잠겨 한가로운 즉, 반드시 마음의 공부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뜻이 있으나 능히 결정하지 못한 것이 대개 오래되었다가 올해에야 비로소 돌아올 수 있었다. 정자에는 옛날에 새긴 시편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내 선조인 정승공이 지은 것이다. 내가 일찍이 그 안에서 풍영하면서 다시 여러 명인들의 작품을 구해다가 이어 놓았었다.

임진란 때 정자의 집과 함께 타버려 이제 곧 바라봄에 마음이 아파 남은 터에 조그만 집을 짓고 다시 여러 시들을 새기어 때때로 보면서 스스로 풀었다. 또 이름을 고쳐 양성이라 하고 당세의 작자들에게 화답을 구하였다.

(遯巖園林中, 舊有亭, 扁曰雅閑, 本世祖朝文士崔淸江之別業也. 後爲吾伯祖父庶尹諱所得, 而余因家焉. 背有小山, 山下有松竹, 前有長林, 林外有淸溪, 白沙明媚, 深可移艇, 又後澗懸流巖石間, 可以濯纓, 引爲上下池, 以種紅白蓮, 又有桃蹊柳汀, 而莎草被堤者可數百步, 梨棗柹栗楮漆桑柘, 環繞左右, 其遠勢則大芚在其南, 鷄龍峙其北, 峯巒崷崪, 咸萃於一席間, 郊外有薄田數頃, 若使僮僕, 勤力其中, 足以供饘粥, 然余生長京洛, 繋官于朝, 役役塵冗, 無一日靜養之功, 而尤悔山積, 回首茫然, 非可以歲月救治也. 若早尋初服, 仰而樂山, 俯而觀水, 觸物悟理, 涵泳優游, 則未必無助於心地上工夫, 而有其志未能決者蓋久, 今歲始得來歸矣. 亭有舊刻詩什, 其一乃吾先祖政丞公所題也. 余嘗諷詠其間, 而復求諸名作以續之矣. 壬辰喪亂, 竝與亭舍而灰燼, 今乃俛仰傷感, 仍構小堂於遺址, 復刻諸詩, 時觀而自釋焉. 又改號曰養性, 而求和於當世之作者焉)"

[의의와 평가]

김장생은 자신의 백조부가 구한 아한정에 새겨진 시들을 읊조리며 즐겼는데, 임진왜란 이후 아한정의 옛 터에 지은 양성당을 중심으로 당대 여러 명사들에게 글을 청하여 새겨서 그 시들을 즐겼다. 양성당을 통한 김장생의 문학 활동은 주로 학문적 인연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제영을 별도로 모아 「양성당 제영」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양성당기」는 당대의 문학과 학문의 중심지였던 양성당의 내력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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