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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대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500
한자 論山大會
영어의미역 Nonsan Rall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고동환

[정의]

1894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개최되었던 남접 및 북접 동학농민군 간의 회합.

[개설]

논산대회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2차 봉기에서 충청남도 공주를 공격하기 위해 전봉준의 남접농민군과 손병희의 북접농민군이 충청남도 논산에서 합류하여 동학농민군 대본영을 설치하기로 결정한 대회(회합)이다.

[역사적 배경]

청일전쟁에서의 승리가 확실해진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집강소 통치를 시행하고 있던 전봉준의 남접농민군이 1894년 9월 13일 전라도 삼례에서 다시 봉기하였다. 그리고 충청도 보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있던 북접농민군도 일본에 맞서기 위해 교주 최시형의 명에 따라 충청도 괴산, 충주 등지에서 봉기하여 보은에 집결하였다. 전봉준의 남접농민군은 최시형의 북접농민군과 연합할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해 전라도 삼례에서 1개월 정도 주둔하면서 북접농민군의 전쟁 참여 의지를 확인하였다.

이후 양군은 충청도 논산에서 연합을 위한 회합인 논산대회를 갖기로 합의하고 남접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북상을 시작하였으며 북접농민군도 손병희의 지휘 아래 논산으로 이동하였다. 전봉준은 논산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같은 해 10월 6일경 선봉대를 파견하여 은진현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논산대회의 개최 지역을 전진 보위하기 위하여 한밭[大田]에도 진군하여 충청도 감영의 병사 80여 명을 격파하였다.

[목적]

동학농민전쟁 1차 봉기 당시의 남접과 북접 간의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로 연합함과 동시에 동학농민군 대본영을 설치하여 청일전쟁에서 승리가 확실해진 일본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해 개최하였다.

[경과]

충청도 논산에서 합류한 양군은 남접농민군의 전봉준과 북접농민군의 손병희의 결의형제와 함께 논산대회를 개최하여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추대하는 한편 논산에 동학농민군의 대본영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12일 전봉준은 경군(京軍)과 충청도 감영 군사 및 백성들에 대한 고시문을 발표하였다. 이 고시문을 통해 전봉준은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은 도(道)는 달라도 척왜(斥倭)와 척화(斥華)에 있어서는 그 뜻이 동일하니 서로 싸우지 말고 연합하여 함께 투쟁할 것을 호소하였다.

[결과]

논산대회에는 극소수였지만 이전에는 동학농민군에 적대적이었던 유생들도 참가하였다. 이 중 공주 출신의 유생 이유상(李裕尙), 여산부사겸영위(礪山府使兼迎慰) 김원식(金元植) 등은 대회 참가 전에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 활동을 수행하였으나 항일의병 활동을 위해 동참한 자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손병희가 직접 인솔하여 논산에 집결한 북접농민군 1만여 명과 남접농민군 중 전봉준의 직할 부대 1만여 명은 나머지 다른 부대원 3만여 명과 함께 같은 달 21일 경 논산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노성과 공주의 경천점(敬川店)에 군영을 설치한 후 3가지 길로 나누어 공주로 진격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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