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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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景場 |
영어의미역 | Ganggyeong Market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대흥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고동환 |
성격 | 재래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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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대흥리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대흥리에서 5일 간격으로 열리는 재래시장.
[개설]
조선시대 강경장(江景場)은 금강 수운을 기초로 하여 주변 지역에서 산출되는 생산물의 집하, 배급 기능을 담당하는 시장이었다. 강경장은 추석이나 설을 전후한 시기에 1만 5천여 명 이상이 몰리는 큰 시장으로, 19세기 초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전국 15개 장시 중 하나로 꼽혔으며, 조선 말기에는 대구장·평양장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이라고 칭해졌다.
[변천]
강경장은 원래 하장(下場)으로서 존재했으나, 1869년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상장(上場)과 하장으로 분리되었다. 이에 따라 강경장은 매월 4일·14일·24일에 열리는 상장과 9일·19일·29일에 열리는 하장으로 한 달에 모두 여섯 번 장이 섰다. 조선 말기 강경장에는 전라도 여산, 충청도 은진, 노성, 부여, 석성의 각 군으로부터 산출되는 미곡, 잡곡, 우피(牛皮), 기타 제 잡품 등이 집하되었고, 외국 수입품 및 서해에서 나는 해산물도 강경을 거쳐 내륙시장으로 유통되었다. 강경장은 충청도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지역까지 포괄하는 광역시장권의 중심 시장 구실을 했다.
전국적 상품 유통 중심지로서의 강경장의 지위는 1899년 군산의 개항, 1905년 경부선, 1912년 군산선, 1914년 호남선 개통을 계기로 점차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군산 개항을 계기로 금강 하류 지역은 군산에, 경부철도 개통으로 청주와 공주 지역은 대전에 잠식당했다. 또한 내륙 철도 교통을 토대로 한 논산장(論山場)이 크게 성장하면서 강경장의 위세는 크게 약화되었다. 1909년경 강경장의 1년 거래액은 상장 25만 2천 원, 하장 31만 3590여 원으로, 이는 당시 104만여 원이었던 논산장 1년 거래액의 절반 규모에 해당하였다.
내륙 교통의 발달로 금강수운이 쇠퇴하면서 강경의 시장권은 위축되었으나 강경은 다시 군산에 종속되는 부차적인 상업 중심지로 변모되었다. 군산의 물자 대부분을 강경에 들여와 판매한 덕분이었다. 이에 따라 유통시장권에서의 지위 하락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적 상품 화폐 경제의 활성화로 인해 강경에서의 상품 거래량과 거래 규모는 그 전 시기에 비해 증가하였다.
인구도 매년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과 청국인 등 외국인들의 거주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강경장의 번영은 1930년대까지 그 명성을 유지했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끝이 났다. 공공기관이 모여 있던 강경이 집중 폭격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근근이 이어지던 강경장도 1980년대 이후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으며, 1990년 금강하굿둑이 세워지면서 금강 뱃길은 완전히 끊어졌다.
[현황]
오늘날 강경 지역에서는 매월 4일·9일·14일·19일·24일·29일에 열리는 전통 재래시장인 강경장과 더불어 대흥시장과 강경젓갈시장이 상설시장으로 옛 영화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강경읍 염천리에 있는 강경젓갈시장에서는 성수기인 7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하루 평균 약 250~300드럼의 젓갈이 거래되며, 전국 판매량의 70%에 달하는 새우젓이 공급되고 있다. 강경젓갈의 명성이 높아지자, 논산시에서는 1997년부터 10월 중순에 강경젓갈축제를 개최함으로써 강경젓갈의 관광 상품화를 도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