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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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院北里-祭 |
영어의미역 | Rite to Tutelary Deity in Jangddukgol Wonbuk-ri |
이칭/별칭 | 원북리 장뚝골 장성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원북리 |
집필자 | 강성복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원북리 장뚝골에서 음력 정월 14일 장군석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지내던 마을 제사.
[개설]
원북리 장뚝골 장승제는 해방 이전에 중단된 마을 제사를 1985년에 부활한 것이다. 이후 노인들과 부녀자가 중심이 되어 몇 해 동안 장승제를 지냈으나 다시 중단되었다. 이 마을의 장군석은 음기를 제어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연원 및 변천]
장뚝골 장군석은 마을을 향해 뻗어 있는 산줄기로 인해 액운이 생기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한 수호신으로 세웠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마을의 지세가 여자의 옥문(玉門)과 같아서 남자들이 바람을 많이 피웠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지나가던 스님의 조언으로 사람의 형상을 한 돌을 만들어서 제(祭)를 올렸더니, 그 이후로는 남자들의 행실이 착실해지고 마을에 평안이 찾아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장군석에 장승제를 지냈다.
[신당/신체의 형태]
원북리 장뚝골 입구에 동자석 모양의 석상 1기와 선돌형 장승 1기가 마주보고 서 있다. 마을에서는 이를 ‘장군석’이라 부른다. 본래는 장군석 내외가 한 쌍으로 조각되어 있었으나, 해방 후 경지정리를 하면서 땅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것을 1985년 마을 주민 김준석이 다시 찾아 세웠는데, 부인상은 찾지 못해 선돌로 대신하였다.
남성인 동자상은 3단형의 시멘트단 위에 안치하고, 그 부인으로 인식되는 맞은편 선돌은 시멘트로 고정시켰다. 크기는 남상은 높이 68㎝, 둘레 92㎝이며, 도포자락을 길게 늘인 채 홀을 들고 손을 마주잡고 있는 형상이다. 머리는 두건이 없는 둥근 형태인데, 이목구비는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었다. 맞은편의 선돌은 높이 약 68㎝, 둘레 88㎝이며, 가공의 흔적이 전혀 없는 자연석으로 된 입석이다.
[절차]
한때 부활되었다가 중단된 원북리 장뚝골 장승제는 따로 제관을 선출하지 않고 김용오가 주관을 했다. 다만 소지를 올릴 때는 불공을 잘 드리는 경주이씨 할머니가 맡는 것이 관례였다. 장승제는 여느 마을처럼 까다로운 금기는 수반되지 않았으며, 비용은 동중계의 기금으로 하다가 나중에는 쌀을 조금씩 갹출했다. 장승제의 절차는 제물(祭物)을 진설한 뒤 헌작-독축-소지 등의 순으로 거행되었다. 제를 마치면 그 자리에서 함께 음복을 하고 한바탕 풍물놀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