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A0102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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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홍난영 |
고청 서기는 생전에 관직에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학식과 재능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그와 얽힌 이야기 속에는 한결같이 그가 비범한 능력을 지닌 신이한 인물로 묘사된다. 여기 그와 관련한 이야기 몇 가지를 소개한다.
[먹물로 대궐의 화재를 끄다]
이 이야기는 『고청봉 정기받은 마을 공암리』(2005) 책자의 250쪽 일부분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옛날에 고청 할아부지가 젊어서 하루는 큰 대감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디, 갑자기 대감더러,
“벼루와 먹 좀 주세요.” 아, 이러는 겨.
대감이 왜 그라냐고 물으닝께,
“시방 한양 대궐에 큰 불이 났습니다.”
아, 이러더라는 겨. 대감이 갸우뚱하면서 벼루와 먹을 내주닝께, 먹을 갈아서 먹물을 손바닥에 붓고 세 번을 튕기는 겨. 그래 대감이 불이 났다는 것은 뭐구, 먹물은 어째서 튕기느냐고 물으닝께,
“한양에 도착하시면 다 아시게 됩니다.”
그렇게만 대꾸하고 아무 소리 안하구 한양까지 간 겨. 대감이 과연 한양에 당도해서 보닝께 대궐에 불이 났는디, 갑자기 마른하늘에 먹구름이 일고 시커먼 먹물비가 내리더니 세 줄금에 불이 꺼지더랴. 말하자면 고청 할아부지가 그럴 미리 알구 먹물로 구름을 만들어서 먹물비를 내렸다는 거지. 그만큼 고청 할아부지는 젊어서부터 참 신출귀몰한 재주가 있었다는 이 얘기여.
그런가 하면 위와 유사한 이야기도 구전된다.
고청 할아버지가 고청봉 밑으로 오기 전 굴바위[孔岩屈]에서 잠시 머물고 있었데요. 그때 한양 대궐에 큰 불이 나서 끄지 못하구 쩔쩔매고 있었어요. 고청 할아부지가 그걸 알고서 굴바위 앞에 있는 물을 입에 잔뜩 물고 대궐을 향해서 품으니 화재가 금새 진화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왕이 할아부지를 불러서 큰 상을 내렸다구 합니다. 때문에 이 굴을 세칭 ‘서고청굴’이라고 이름이 나 있어요. 공암굴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이 있는디, 이 물은 약물로 유명해요.
이상의 내용은 2005년 당시 서인식, 서광호, 서인호, 서영호, 서규호 등의 제보에 따른 것이다.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피신처를 알려주다.]
이 이야기는 『고청봉 정기 받은 마을 공암리』(2005) 책자의 251쪽 일부분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고청 할아부지 아드님이 형제신디, 하루는 그 아들덜 보구 말씀을 하시는겨. 인제 왜놈들이 쳐들어와서 난리가 날 것 같으면 도덕골로 피신을 해야지 다른 데루 가면 다 죽는다고 그러시는 겨.
그랬는디, 진짜루 난리가 났어요. 두 양반이 도덕골로 갈라구 말고개 올라가서 보닝께, 왜병이 새까맣게 몰려와. 고청 할아부지 말대루 도덕골로 갈려면 그리로 가야 되는디, 인제 큰 일 났제. 그래 큰 양반은 무서워서 못간다구 다른 데루 피신을 하려다가 상신리 고개에서 산불이 나서 그만 돌아가셨댜. 그래서 그 고개를 ‘구재’라구 불러요. 원수구자를 써서. 상신리에서 갑사 넘어가는 고개 있잖여. 그게 구재여.
그때 작은 양반은 선친 말씀이닝께 따라야 한다구 해서 그냥 그리루 갔대요. 그래 왜놈들 한테 포로로 잡혀서 고초를 좀 겪으시긴 하셨지만 결국 목숨은 부지했데요. 그래서 우리 서씨네가 이렇게 퍼져 나간 겨.(2005년 당시 제보자-서인식, 서광호, 서인호, 서영호, 서규호 등)
[왜란이 일어나면 뿔난 사람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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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를 진 농군
고청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걱정하며 중봉 조헌과 상의하고 대책을 연구하였다. 계룡산 갑사에 있던 영규대사도 매일 저녁 계룡산을 넘어와서 고청 선생을 만나 왜군이 침입해 올 것을 걱정하였다.
고청 선생은 왜란이 일어나기 일 년 전에 세상을 떴는데 그 전에 동민들에게 왜란이 일어나면 뿔이 난 사람만 산다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뿔난 사람이란 지게를 져서 양쪽으로 뿔이 난 듯하게 보이는 사람, 곧 나무꾼과 농사꾼 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 후 왜란이 끝나고 보니 과연 지게를 지는 농사꾼들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자라를 먹지 않는 서씨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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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 영정
옛날에 고청 선생이 주자 영정을 구하려고 중국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 그때마다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매번 자라가 마중 나와서 고청 선생을 등에 태우고 서해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고청 선생은 힘이 장사여서 석 자 세 치 나가는 쇠나무개(쇠로 만든 나막신)를 신고 바다를 건넜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고청의 후손들은 자라를 먹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신동(神童)이라 불린 서고청]
고청 서기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총명하여 신동이라 불리었다. 일곱 살 때 지은 시(詩)가 지금까지 전한다. 그가 배우는 서당의 숙사가 헐리게 되자 ‘서당장물훼 사아학성현(書堂長勿毁 使我學聖賢, 서당을 헐지말고 오래보존하여 내가 성현을 배울 수 있게 하소서)’이라는 글을 지어 스승[師長]에게 보인 것이다.
조금 더 자라 한번은 산에 나무하러갔다가 늦게 집에 돌아온 적이 있다. 집안어른들은 걱정을 하다가 그가 오자 늦은 것을 크게 꾸짖었는데 그때 고청은 “새가 날아 오르되 오르락 내리락 하기로 그 이치를 알아보다가 늦게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집안 어른들이 그 이치를 말해보라 한 즉 고청은 “봄이 되어 땅기운이 상승하여 이 새가 그 기운을 타서 오르락 내리락하더이다”라고 대답했다. 그의 이러한 탐구정신은 훗날 한 학문을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고청선생과 연지(蓮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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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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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과 연지, 연정들
연정마을 북쪽에 깎아지른 듯한 벼랑 밑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옛날에 연정은 수천 평이 넘는 큰 연못이었는데 고청 선생이 글을 읽다가 낚시질을 하고 거북이를 타고 놀았던 곳으로 전한다. 이 연못에서 바다 속의 푸른 용이 나왔다고 하여 청룡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차츰 연못이 줄어들고 주변은 논으로 변해서 지금은 25평 밖에 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서씨 문중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연못물을 품어 올려서 보름날 시제의 제수로 올릴 붕어를 잡았다. 예전에는 하루를 빼고는 절대 고기를 잡지 못하게 하였으나 지금은 메꾸어져 좁아졌을 뿐만 아니라 고기가 더 이상 나지 않는다.
(이상의 이야기는 『고청봉 정기받은 마을 공암리』(2005, 공암리지편찬위원회)를 참고하였음)
[정보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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