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의 가계]

서기의 선계(先系)나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다. 같은 시대 사람인 중봉(重峰) 조헌(趙憲)은 1586년 공주제독을 지낼 때에 임금에게 올린 소장에서 그를 ‘양인(良人)’으로 표현했고, 서기가 만년에 공암에서 강학할 때 공주목사였던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1534-1591]는 서기의 출신이 ‘비미(卑微)하다’고 했으며, 서기의 벗이었던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華)는 서기의 〈묘갈명 병서〉에서 ‘여러 대에 걸쳐 한족(寒族)으로 아버지 이름은 구령(龜齡)’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후대에는 ‘출신이 한미하다’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는데 이처럼 고청의 신분과 출생에 대한 전설과 민담이 후대로 내려올수록 풍부해진 까닭은 아마도 당시 사족을 중심으로 한 철저한 신분제사회의 상황에서, 한미한 출신인 그가 거의 초인적 역량으로 일세에 뚜렷이 드러날 만한 학행과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후세인들이 그의 일생에 대한 신비적 특성을 증폭시키려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서기의 생애]

서기의 유년생활은 생활이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으로 들에 나가 꼴을 베는 등의 가사 일을 도와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일찍부터 자연의 이치를 연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며, 어려서는 일찍 글을 깨치게 되었다고 한다. 5살 무렵에는 서당에 다녔는데 당시에 서당의 숙사가 헐리게 되자 서당이 헐리지 않기를 바라는 시를 지어 훈장에게 보였는데 그 시가 현재까지 전한다.(시 내용은 ‘고청서기에 얽힌 신이한 이야기’편 참조.) 7살에는 어머니가 병환으로 눕자 손가락을 베고 피를 내어 드릴 정도로 병구완을 극진히 하였다. 이후 향리의 절에 들어가 선학(禪學)을 배우고 제자백가를 배우는 등 학업을 계속 하였다.

서기의 생애와 학문세계에서 일대의 전환기를 맞이하는 것은 20여세에 여섯 살 연상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1517-1578]을 만나면서부터이다. 이지함과의 만남은 그로 하여금 불교를 버리고 유학을 공부하게 했다. 당시 홍주에서 이지함이 사는 보령까지는 20리나 되는데도, 도보로 매일 다녔다고 회고할 정도로 학문에 대한 돈독함을 보였다. 한편 이지함은 서기를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1512-1554]에게 나아가 『대학』·『중용』 등 성리서를 체계적으로 배우도록 했다. 또한 이 시기에 서기는 이지함과 함께 사방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남쪽 바다를 건너 탐라(지금의 제주도)의 한라산에 오르기도 했다. 일설에는 이때 한라산에서 이지함과 헤어져 바다 건너 명나라 도읍에 가서 주자(朱子)의 진상(眞像)을 구해왔다고도 한다.

서기의 장년기는 그동안 공부한 학문, 특히 이중호에게서 3년간 수학한 학문을 향리에서 직접 실천에 옮기려 한 시기이다. 우선 고향 홍주로 돌아와, 고을 풍속이 일천함을 탄식하면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고을 사람을 불러모아 향약소(鄕約所)를 만들어 강신당(講信堂)이라 이름짓고, 날마다 예의를 익히도록 했다. 그러자 마을의 악소배(惡少輩)들이 미워하여 몰래 그의 집에 불을 놓았다. 그는 향리의 교화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 한편, 뜻하지 않은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처자와 함께 지리산 홍운동(紅雲洞)에 들어갔다. 그 시기는 40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리산에서의 생활도 어려움이 많았으나, 학문연구와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아 차츰 인근에서 소문을 듣고 수학하고자 찾아오는 제자들이 늘어났다. 때문에 근처의 승려들과 마찰이 잦아지게 되었고, 결국 4년 만에 서기는 지리산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공주의 공암(孔巖)으로 옮기게 되었다.

공주 공암에 살았던 서기의 노년기는 이전보다 비교적 정신적으로 안정된 생활 속에서 후학을 본격적으로 양성하였다. 그가 69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학문으로 명성이 인근에 널리 알려져 공주를 비롯한 여러 고을에서 제자들이 운집했으며, 학당인 공암정사가 세워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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