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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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濚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54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향주 |
부임|활동지 | 유영 부임지 - 전라북도 김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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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단소 | 유영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54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진주(晉州) |
대표 관직 | 김제 군수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할아버지는 세조 조의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예빈시 정·광주 목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영의정으로 추증된 유양(柳壤)이며, 할머니는 정즙(鄭楫)의 딸인 청주 정씨(淸州鄭氏)이다. 아버지는 유첨정(柳添汀)이며, 어머니는 홍종(洪琮)의 딸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주도하여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관직이 의정부 우의정 겸 판병조까지 이른 유순정(柳順汀)이 삼촌이다. 형제로 유보(柳溥)가 있으며, 아들은 유사기(柳師琦)와 유사석(柳師奭)이다.
[활동 사항]
유영(柳濚)은 1506년(중종 1) 삼촌 유순정과 함께 중종반정에 가담하였다. 같은 해 9월 8일 반정 때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분의정국공신 4등에 책록되었으나, 1519년(중종 14) 조광조(趙光祖) 일파로부터 외람되게 녹권(錄券)을 받은 자로 지목되어 훈적(勳籍)에서 삭제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조광조가 실각된 후 비로소 복적(復籍)되어 공권(功券)을 돌려받았다.
1524년(중종 19) 김제 군수로 재직하던 중 취학(就學)하지 않는 교생(校生)에게 혹형(酷刑)을 내린 혐의로 파직을 당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526년(중종 21) 충훈부 도사로 서용된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따르면, 당시 사헌부는 유영이 죄를 입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서용된 데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국왕에게 체직(遞職)을 요청하였으나, 중종은 끝내 사헌부의 요청을 들어 주지 않았다. 1539년(중종 34) 정국공신을 위한 위로연에 전설시수(典設寺守)로 참석하여 중종으로부터 아마(兒馬) 1필을 선사받았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진주 유씨 묘역 내 서편에 아들 유사기, 삼촌질(三寸姪) 유사상(柳師尙, 柳師商)의 묘와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