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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공립보통학교 격문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20
한자 石門公立普通學校檄文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통정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30년 1월 14일 - 석문공립보통학교 격문 사건 유인물 배포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0년 1월 14일 - 석문공립보통학교 격문 사건 유인물 작성
발생|시작 장소 석문공립보통학교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통정리 석문 초등학교지도보기
종결 장소 석문공립보통학교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통정리 석문 초등학교
성격 항일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신간회 당진 지회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석문공립보통학교에서 1930년 1월에 일어난 만세 격문 사건.

[개설]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이 발생한 이후, 학생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30년 1월 15일 당진시 석문면 통정리에 있는 석문공립보통학교[현 석문 초등학교]에서 ‘만세 불러’라는 격문이 발견되었다. 격문을 배포한 인물은 신간회 당진 지회에서 활동하던 인원수와 석문공립보통학교 훈도 인운식이었다. 이 운동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지만, 예산 농업 학교의 독서회 사건보다 일주일 정도 먼저 일어난 항일 만세 격문 운동이었다.

[역사적 배경]

석문공립보통학교 만세 격문 사건 당시는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난 직후였고, 전국적으로 학생 운동이 파급되던 시기였다. 한편 당진 지역의 민족 운동가들은 당진 청년 동맹신간회 당진 지회를 결성하고 활발한 청년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진 지역의 민족 운동가들은 광주 학생 운동을 계승하여 더욱 치열한 민족 운동을 일으키고자 계획하였다.

[경과]

신간회 당진 지회에서 활동하던 석문 출신 인원수(印鵷洙)[인완수라고도 함]는 1929년 12월 28일 신간회 당진 지회 제3회 정기 대회에 참석하였다. 인원수는 당진 지회 간부인 고인환(高麟煥)으로부터 1월 18일은 학생의 기념일이며, 이 날을 기하여 전 조선의 학생들이 만세를 부를 계획이라는 말을 들었다. 또한 1930년 1월 초순경, 조선인 학생의 소요 사건이 서울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을 각종 신문을 통하여 알게 된 인원수는 자신이 거주하는 석문면 통정리석문공립보통학교에서도 운동을 전개하기로 작정했다.

인원수는 1930년 1월 6일 고대면 용두리 시장에서 고인환을 만나 그 취지를 전했는데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 인원수는 곧바로 석문공립보통학교 훈도인 인운식(印雲植)을 찾아가 상의했다. 인운식은 당시 석문면 통정리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인원수에게는 같은 집안 인물로 항렬로는 한 단계 아래였다. 인운식은 적극 동참하기로 작정했다.

1930년 1월 14일 밤, 인원수는 백지에 연필로 “만세를 불러라, 만세 불러.”라는 내용의 유인물 약 40매를 작성하였다. 마침 15일은 인운식이 석문공립보통학교 당직이었다. 인원수는 15일 밤 10시경 격문을 갖고 학교 숙직실로 인운식을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은 숙직실에서 교실로 통하는 복도 입구에서 망을 봤다. 인운식은 유인물을 들고 5학년생 교실로 들어가 36명의 책상 속에 배포했다.

이 사건은 다음날 발각되었다. 이 격문을 살포한 혐의로 석문공립보통학교 훈도 인운식이 체포되었고, 이에 동조한 혐의로 신간회 당진지회 간부이며 『조선 일보』 당진 지국장인 고인환[일명 고일(高一)], 당진 지회의 임종만(林鍾萬)·인원수·이충범(李忠範)·정형택(鄭亨澤)·정유석(鄭有錫)·인장식(印章植) 등이 체포되었다. 하지만 고인환·인원수·임종만·인운식 등 네 명만 검찰에 송치되었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8개월 동안 홍성 예심감에서 취조와 고문을 받던 인운식은 결국 병보석이 되었으며 나머지 3명도 8월 25일 예심 종결로 귀가했다.

[결과]

만세 운동 혐의자 고인환·인원수·임종만·인운식 등 네 명에 대한 보안법 위반 사건은 1931년 6월 25일, 1년 반의 기간을 끌다가 공주 지방 법원 재판에 회부되었고 검사로부터 6개월의 구형이 있었다. 하지만 7월 30일 최종 판결이 있었고, 결국 피고 4명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 후 검사의 항고에 의하여 9월 10일, 경성 복심 법원에 회부되었지만 최종 무죄로 확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석문공립보통학교 격문 사건은 1929년의 연말부터 1930년 봄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된 학생 운동과도 관련이 깊었다. 예산군에서도 석문공립보통학교 격문 사건 직후인 1930년 1월 23일, 예산 농업 학교 동맹 휴학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학생들의 맹휴가 실패로 돌아간 직후인 1월 24일 밤에는 예산 농업 학교와 인근 예산 읍내에 격문이 뿌려지기도 하였다.

석문공립보통학교 격문 사건은 예산 농업 학교 맹휴 사건보다 일주일 정도 먼저 일어난 항일 운동이었다. 하지만 석문 공립 보통학교 격문 사건신간회 당진 지회에 대한 탄압의 구실을 찾던 일제 경찰에게 좋은 탄압의 빌미를 제공했다. 일제는 장기간에 걸친 지루한 법정 구속과 감시를 통해 당진 지회의 활동에 결정적인 탄압을 가한 것이다. 그리고 1931년 9월, 신간회 당진 지회의 해소[해산]를 지켜본 일제는 석문공립보통학교 만세 운동 관련자 4명을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시켰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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