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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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傳 朴信龍將軍 衣帶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동남리 산16-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규완 |
제작 시기/일시 | 18세기~19세기 - 전 박신용장군 의대 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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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80년 4월 1일 - 전 박신용장군 의대 국가민속문화재 제110호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전 박신용장군 의대 국가민속문화재로 변경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4년 5월 17일 - 전 박신용장군 의대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변경 지정 |
현 소장처 | 국립부여박물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동남리 산16-1] |
원소재지 | 유의각 - 충청남도 청양군 운곡면 위나리 |
출토|발견지 | 유의각 - 충청남도 청양군 운곡면 위나리 |
성격 | 의복 |
소유자 | 박용현 |
관리자 | 국립부여박물관 |
문화재 지정 번호 | 국가민속문화유산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는 조선 후기 무신 박신룡의 복식과 요대.
[개설]
전 박신용장군 의대(傳 朴信龍將軍 衣帶)는 조선 후기 무신인 박신용(朴信龍)과 관련되었다는 복식 4점이다. 박신용은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서 후금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전란 과정에서 시신조차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박신용이 입었던 복식과 신발로 묘소를 만들어서 매장하였다고 전해진다. 1885년(고종 22) 건립한 유의각(遺衣閣)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을 1980년 4월 1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이후에 문중에서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이관하였다. 전 박신용장군 의대는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국가민속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바뀌었다.
박신용에 대한 기록은 1874년(고종 11) 궁내부특진관, 종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한 민병승(閔丙承)이 찬한 신도비명(神道碑銘)과 1896년(고종 33) 이최(李崔)의 유의각비문(遺衣閣碑文)에 잘 나와 있다. 박신용은 1575년(선조 8)에 태어나서 1618년(광해군 8) 43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1626년(인조 4) 부장(副將)의 추천으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이후 의주부윤(義州府尹) 이완(李莞)의 천거를 받아서 권지중군(權知中軍)이 되어서 의주를 지켰다. 정묘호란에서 전사한 후 1631년(인조 9)에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추증되었고, 1685년(숙종 11)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이후 1751년(영조 27)에는 정려를 받았다.
[형태]
단령(團領) 1점, 청철릭(靑帖裡) 1점, 홍철릭(紅帖裡) 1점, 전복으로 입었던 답호(褡穫) 1점이 있다. 국가민속문화재로 등록되지 못한 명주로 만든 대(帶) 3점도 추가로 남아 있다.
관복은 깃의 모양이 둥근 단령이며, 가슴과 등 부분에는 흉배가 없다. 소매가 넓고, 홑겹의 모시로 이루어져 있다. 철릭은 조선 시대 문무 관리들이 외국 사신으로 파견되거나 국난을 당했을 경우, 임금을 호종할 때 착용하던 옷이다. 전 박신용장군 의대에는 푸른색 명주로 만들어진 청철릭과 붉은색 명주로 만들어진 홍철릭이 있다. 이중 청철릭의 크기는 품이 32㎝, 치마 길이는 94㎝이다. 홍철릭 또한 청철릭과 비슷한 크기와 모습을 하고 있다. 전복은 겉옷 위에 덧입는 소매 없는 옷이며, 전복으로 입었던 답호의 겉은 보라색이고, 속과 동정은 흰색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가 퍼진 모양이다.
[특징]
전 박신용장군 의대의 형태로 미루어 보아 박신용 장군 사후 숙종 대에서 영조 대 사이에 증직, 정려되는 과정에서 후손에 의하여 몇 차례에 걸쳐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단령과 철릭, 답호 등의 형태가 박신용 장군의 생존 시기의 특성을 보이지 않고, 그보다 100여 년에서 200여 년 이후인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특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지정 명칭 앞에 ‘전(傳)’ 자를 붙이고 있는 이유는 박신용이 썼던 것으로 전하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복식들의 연대를 추정하여 보았을 때 박신용 사후에는 박신용의 옷을 마련하지 못하고 숙종~영조 시기에 증직, 정려를 세우는 과정에서 후손들에 의하여 몇 차례에 걸쳐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조선 시대 시신이 없을 때 시신을 대신하여 관련 물품을 봉안하는 특징을 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