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4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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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扶餘共産主義者協議會事件 |
영어공식명칭 | Buyeo Communist Consultative Group Cas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혜영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1년 1월 15일 - 부여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 금강문인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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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931년 10월 5일 - 부여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 금강문인회에서 공산주의연구협의회로 개칭 |
전개 시기/일시 | 1933년 3월 - 부여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 공산주의연구협의회에서 공산주의자협의회로 재조직 |
종결 시기/일시 | 1933년 6월 - 부여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 공산주의자협의회 자진 해체 |
전개 시기/일시 | 1933년 9월 - 부여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 공산주의자협의회 54명 일제 경찰에 검거 |
발생|시작 장소 | 금강문인회 설립지 -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
종결 장소 | 공산주의자협의회 체포 장소 - 충청남도 부여군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노명우|이호철|장창선|유기섭|오기영|강일구|최재봉|금강문인회|공산주의연구협의회|공산주의자협의회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여 지역에서 사회주의 계열 혁신 청년들이 검거된 사건.
[개설]
부여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扶餘共産主義者協議會事件)은 1933년 9월 충청남도 부여 지역의 사회주의 세력 청년들이 대거 검거된 사건이다. 부여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의 발단이 된 공산주의자협의회는 사유 재산 제도 부정과 공산주의 사회 실현을 목표로 조직된 비합법적 비밀결사였다.
[역사적 배경]
1920년대 중후반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세력이 형성되어 문화 계몽 운동에 그친 기존의 사회 운동에 변혁을 시도하였다. 노명우(盧明愚) 등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은 부여 지역의 혁신적 청년들과 함께 새로운 단체를 결성하고, 유지 집단 중심의 기존 조직을 청년 중심으로 전환하려 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탄압과 조직적 한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1930~1931년 두 차례에 걸쳐 추진한 혁명적 농민 조합 결성도 실패로 끝났다. 일제의 탄압으로 합법적 공간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사회 운동은 점차 비합법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부여 지역의 사회주의 세력은 사유 재산 제도를 부인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경과]
1931년 1월 15일 노명우, 이호철(李戶喆), 장창선(張昌善), 유기섭(柳基燮), 오기영(吳基暎) 등은 부여군 홍산면에서 금강문인회(錦江文人會)를 조직하였다. 금강문인회는 농민 야학을 통하여 빈농과 빈농의 자녀를 대상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한 합법 단체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로 금강문인회 활동이 한계에 봉착하자 노명우 등은 1931년 10월 5일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에 모여 금강문인회를 비합법적인 비밀 결사이자 연구 기관인 공산주의연구협의회로 전환시켰다. 공산주의연구협의회는 무산 계급의 해방, 사유 재산 제도 부정, 공산주의 사회 실현을 목표로 삼았다. 이호철이 책임 대표자를 맡았으며, 서기 노명우, 조사부장 장창선, 교양부장 강일부, 평의원으로 최재봉이 있었다. 조직 결성 후 표면적인 명칭을 ‘10월회’로 정하고 매월 1회씩 월례회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곧이어 이호철이 만주로 떠나면서 활동은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1933년 3월 이호철이 귀향하여 공산주의연구협의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하였다.
공산주의자협의회는 각 마을에 야학을 개설하고 연극과 강연회를 개최하여 농민들을 사상적으로 교양하기로 하였는데 활동이 부진하여 1933년 6월 무렵 자진 해체하였다.
[결과]
1933년 9월 첫째 주 일요일의 국제 무산 청년 데이를 기해 일본 도쿄로부터 삐라가 반입되자 경찰이 이호철과 노명우 등 부여 지역 사회 운동가 54명을 체포하였다. 이러한 계기로 공산주의자협의회의 활동은 경찰에 발각되었고, 체포된 인사들 중 유기섭은 징역 3년, 노명우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 이호철·최재봉·오기영·강일구 등은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의의와 평가]
부여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은 1920년대 중후반 이후 형성된 부여 지역의 사회주의 세력이 1930년대 들어 합법적 공간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사회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 의하여 적발된 사건이다. 부여 지역의 사회 운동가 54명이 검거된 부여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으로 부여 지역의 혁명 운동과 비밀 결사 운동은 동력을 잃고 좌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