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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0144
한자 陰城縣地圖
영어의미역 Map of Eumseonghyeon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주성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린 고지도.

[개설]

충청북도 음성군(옛 음성현)의 고지도로는 『광여도(廣輿圖)』, 『해동지도(海東地圖)』, 『1872년 지방지도(地方地圖)』, 『여지도(輿地圖)』,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 『조선지도(朝鮮地圖)』,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 등이 있다.

[광여도]

19세기 초 필사본 회화식으로 만들어진 전국 군현지도집인 『광여도(廣輿圖)』의 음성현 지도에는 관아 건물이 있는 음성현 읍치(邑治)의 건물과 주변의 산천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광여도』는 『여지도』를 복제한 것으로 제작자는 불분명하다.

음성현 읍내리의 읍치를 성곽처럼 표시하였고 그 안에는 객사(客舍)와 관아(官衙)를, 밖에는 향교(鄕校)와 창(倉)을 그려 넣었다. 읍치 북쪽의 음성읍 용산리가섭산(迦葉山)[709m]이 음성현의 진산(鎭山)이 되는데 지도에 봉대(烽臺)가 그려져 있다. 동쪽으로는 충주의 마산(馬山), 북쪽으로는 망이산(望夷山)의 봉수(烽燧)와 연결된다.

읍치 남쪽으로 여러 하천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북동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 주변의 산줄기를 모두 읍치를 향하게 그린 점이 이채롭다. 산의 이름과 주변의 직산, 청주, 진천, 충주와 통하는 고개[현(峴), 치(峙)]를 자세히 표시하였다. 북쪽에 표시된 뇌성산(雷城山)[설성산(雪城山)]의 산성은 음죽현(현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에 있었던 성으로 신라 내물왕이 왜구의 난을 피하여 쌓았다고 전한다.

[해동지도]

1750년대 초 회화식으로 제작되어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데 활용되었던 관찬(官撰) 군현지도집인 『해동지도(海東地圖)』의 음성현 지도는 조정에서 관찰사를 통해 음성현에 명령으로 하달되어 만든 것을 조정에서 다시 정서한 것으로 제작자는 불분명하다. 『해동지도』에는 음성현소이면을 제외한 음성읍·금왕읍·삼성면·감곡면·대소면·생극면·맹동면·원남면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음성현은 금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분수계에 자리하는 데 음성현에서 북쪽으로 8리 떨어진 가섭산이 진산이 된다. 가섭산의 정상에는 봉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읍치 위쪽에 위치한 망산(望山)은 현대 지형도에 있는 수정산[393m]일 것으로 생각된다. 수정산 정상에는 산성 터가 남아 있고, 산성 터의 남쪽에는 고읍유지(古邑遺址)가 있어 관평(官坪)이라 불린다.

수정산 남쪽에 있는 수정사 터에서 “신라경문왕5년(新羅景文王五年)”이라 적힌 기와가 발견되었다. 관세음보살입상과 노사나불좌상이 있는데, 좌상은 1968년 윤병준이 발견하여 머리가 잘린 것을 복원하였다. 위쪽에 보이는 설성산은 음죽현의 진산으로 산성이 있다.

[1872년 지방지도]

대원군은 1872년 3월부터 6월에 걸쳐 전국 지방의 지도를 제작해 올리게 했는데 이것이 필사본 회화식으로 제작된 총 459장의 『1872년 지방지도(地方地圖)』이다. 『1872년 지방지도』는 지금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금왕읍, 생극면·감곡면·대소면·삼성면·원남면 일대로 읍치를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 강조하였다.

주변의 면에는 소속 리명과 인구 수를 병기하여 지지(地誌)를 결합한 양식을 띠고 있고 주요 산과 하천에는 연결 관계를 주기(註記)하여 이어지는 맥과 흐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고을의 진산인 가섭산에서 뻗어 내린 맥을 풍수의 산도(山圖)에서 볼 수 있는 기법을 사용하여 강조하였고 오두산(烏頭山), 수정산(水晶山) 등지에는 성첩을 그려 산성이 있음을 부각시켰다. 읍치 전방의 장시(場市)와 도로를 따라 형성된 점(店)들은 당시 상업 발달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주변의 사창도 그려져 있어 사창제(社倉制)의 실시를 나타내고 있다.

[여지도]

18세기 중엽 필사본 회화식으로 제작된 『여지도(輿地圖)』의 음성현 지도는 조정에서 관찰사를 통해 음성현에 명령으로 하달되어 만든 것을 조정에서 다시 정서한 것으로 제작자는 불분명하다. 『여지도』는 『광여도』와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에 있어서는 거의 같으나 읍치 아래쪽의 감원역(坎原驛)이 『광여도』에는 구원역(玖原驛)으로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읍치에 읍성이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는 점이 특이한데 『해동지도』를 포함한 다른 지도나 지리지에서는 읍성이 있었다는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주기에도 읍성을 의미하는 성곽이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의 음성현 지도에 보면 아사(衙舍)와 객사(客舍)가 같은 담장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읍성 안에 있는 창고도 밖에 표시되어 있다. 이를 볼 때, 『광여도』와 『여지도』의 작성자가 여러 지도를 그리면서 잘못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읍치 지역의 풍수적 명당 이미지를 확대·과장해서 그렸기 때문에 실제와 다르게 표현된 측면이 발견된다. 읍치 아래쪽을 흐르는 하천이 현재 달천으로 흘러들어가는 음성천(陰城川)이다. 그런데 아래쪽에 표시된 원서면(遠西面)이 마치 음성천 유역에 있었던 것처럼 표현된 것은 잘못이다. 원서면은 진천계(鎭川界)로 흘러가는 미호천(美湖川)의 지류인 초평천(草坪川)의 상류에 해당된다.

『해동지도』의 경우 이 하천이 작게나마 그려져 있다. 그런데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아예 이 하천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아마 고을 전체와 읍치의 풍수적 명당성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생략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비변사인방안지도]

18세기 중엽 비변사에서 필사본 방안식으로 제작된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의 음성현 지도는 현재의 음성군 음성읍원남면에 해당되는 지역을 나타내고 있다.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서쪽에 있는 가섭산이었다. 동쪽의 하천은 한강의 달천으로 흘러들어가는 음성천이며, 왼쪽은 금강의 미호천으로 흐르는 초평천의 상류이다.

다른 지도에 비해 산과 고개에 대한 표시가 자세한 점이 특징이다. 적황색·황색·남색으로 도로의 중요성을 표시한 다른 지도와는 달리 적황색만 사용하였다. 위쪽의 주기 영애(嶺隘) 부분에는 중요한 고개에 ‘대로(大路)’라는 표시를 하여 중요성을 알 수 있게 하였다. 봉수는 호응 관계에 있는 다른 곳과 직선의 분홍색을 그려 넣었으며, 오른쪽 주기에 자세한 내용을 적어 놓았다.

지도에는 역의 위치가, 주기에는 역에 배치된 말의 종류와 수를 써 넣어 지도와 지지의 장점을 모두 살리고 있다. 아울러 주기에는 동면(東面)이라 표시한 것이 지도에는 동도면(東道面)이라고 적혀 있어 착오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사찰도 자세히 표시되어 있어 중요한 정보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지도]

18세기 후반 필사본 방안식으로 제작된 『조선지도(朝鮮地圖)』의 음성현 지도는 조정에서 관찰사를 통해 음성현에 명령으로 하달되어 만든 것을 조정에서 다시 정서한 것으로 제작자는 불분명하다. 『조선지도』는 음성군 음성읍원남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을 나타내고 있다.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고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가섭산이다. 이 가섭산의 한자 발음은 ‘가엽산’이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아 ‘가섭산’으로 불린다. 고을은 크게 두 개의 유역권으로 나뉜다.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한강의 지류인 달천으로 들어가는 음성천이고 아래쪽의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으로 들어가는 초평천의 상류이다.

전자의 읍치 부분은 원래 음성현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후자는 기록에 ‘남쪽 20리에 있었다’는 파천부곡(巴川部曲)의 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은 ‘보천리(甫川里)’로 불리는데, ‘파천(巴川)’과 ‘보천(甫川)’은 같은 발음에 대한 다른 표기로 보인다. 우리말로는 ‘보내’이다. 이곳에는 포화리(浦火里)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파천’에 대한 다른 표기로 보인다. 파천부곡은 조선 초까지도 채씨(蔡氏)·경씨(敬氏)·윤씨(尹氏) 등의 성씨가 거주하고 있을 정도로 독자성이 상당히 강했다.

북서 방향의 사정(沙亭) 부근은 한강의 지류인 청미천으로 들어가는 응천의 상류이다. 여기서 사정은 정자의 이름이 아니라 이 지역에 있었던 마을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모래물’이라고 부르며, ‘사정(沙丁)’ 또는 ‘사정(沙井)’으로도 쓴다. 이곳은 ‘서쪽 15리에 있었다’는 금촌부곡(金村部曲)의 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작성자가 읍치 외의 지역에 ‘면(面)’이 설치되었음에도 마을의 이름을 특별히 기록한 것은 당시까지도 독자적인 단위로 작용하던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조선지도』에 나오는 우리말과 한자 표기를 보면, 탄현(炭峴)은 현재 ‘숫고개’로 불리며, 초천(草川)은 ‘풋내’ 또는 ‘풀내’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이와 같은 지명은 음보다는 뜻을 따서 붙인 것이다. 반면에 ‘행치(行峙)’는 우리말의 ‘향티’ 또는 ‘행티’를 한자로 표시한 것으로서 뜻보다는 음을 따서 붙인 경우이다. 『조선지도』에서는 찾기 어려우나 음과 뜻을 동시에 따서 붙인 한자 표기도 다수 발견된다. 이밖에 다른 기록을 보면 음성현에 원서면(遠西面)이 분명히 있었는데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아 의아스럽다.

[팔도군현지도]

18세기 후반 필사본 방안식으로 제작된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의 음성현 지도는 조정에서 관찰사를 통해 음성현에 명령으로 하달되어 만든 것을 조정에서 다시 정서한 것으로 제작자는 불분명하다. 『팔도군현지도』는 지금의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소이면을 제외한 음성읍·금왕읍·삼성면·감곡면·대소면·생극면·맹동면·원남면 지역을 나타내고 있다.

음성현의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음성은 금북정맥의 동사면에 위치하면서 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가섭산이다. 부용산을 분수령으로 세 개의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남사면에서 미호천이 발원하여 부윤천(富潤川)초평천을 합류해 진천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동사면에서는 음성천이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면서 갑산천(甲山川)구안천(九安川)이 합류해 음성평야를 형성하며, 서사면에는 응천(鷹川)이 발원하여 북류하면서 하곡평야를 이루고 청미천(淸美川)과 합류해 한강에 흘러든다.

고을의 다른 명칭은 설성(雪城)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 고을에는 가섭산에 봉수가 설치되어 동쪽으로 충주 마산(馬山) 봉수와 마주보고, 북쪽으로는 충주 망이산(望夷山) 봉수에 응하는 데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참고문헌]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http://e-kyujangga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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