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학의 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427
한자 李夢鶴-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엄기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6년연표보기 - 이몽학의 난 발생
성격 역모 사건
관련 인물/단체 이몽학|선조

[정의]

1596년 이몽학의 주도로 부여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 사건.

[개설]

이몽학의 난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크고 작은 반란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홍산(鴻山)[현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에서 시작된 반란군은 1596년(선조 29) 7월 홍산, 임천, 정산 등을 함락시키고 홍주로 진격하였으나, 관군의 대처로 홍주성 점령에 실패하였다. 이후 반란군은 전열을 잃었고, 주동자였던 이몽학(李夢鶴)은 반란군에 의해 참살되면서 반란 사건은 끝이 났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은 조선 사회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일본군의 침입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도 컸으나, 전쟁 기간에 발생한 흉년과 전염병은 일반 민중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 협상을 두고 당파 간 논쟁이 첨예하였고, 일본의 재침을 방비하기 위하여 산성 수축 등에 집중하였으므로 기근과 같은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국가적 혼란 속에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났고, 그중 하나가 1596년 부여 지역에서 발생한 이몽학의 난이다.

[경과]

이몽학은 왕실 서얼 출신으로 홍산현 구룡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부여 지역 설화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비범한 인물이었다고 하며, 홍산의 비홍산 정기를 받고 태어난 장군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실제로는 집안에서 퇴출되어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를 떠돌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몽학은 한현과 함께 홍산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역모를 계획하고 군사를 조련하였으며, ‘동갑계(同甲契會)’를 조직하여 반란군을 규합하였다. 이몽학의 반란군은 김경창(金慶昌)·이귀(李龜)·장후재(張後載)와 도천사(道泉寺)의 승려 능운(凌雲) 등이 참여하였고, 승속군(僧俗軍) 1,000여 명 규모였다.

1596년 7월 6일 이몽학의 반란군은 홍산현을 습격하여 현감이었던 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곧이어 임천군을 습격하여 군수 박진국(朴振國)을 납치하였다. 반란군은 계속해서 주변 고을로 진격하여 7월 7일에는 정산현, 7월 8일에는 청양현을 함락시켰고, 7월 9일에는 대흥현까지 점령하였다. 이처럼 세력이 급속도로 확장되자 반란군의 규모는 수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몽학은 기세가 오르자 대흥현을 함락한 날에 바로 지역 중심지였던 홍주를 공격하였다. 이때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관속(官屬) 이희(李希)와 신수(申壽)를 반란군 진영으로 보내 시간을 끌게 하는 한편,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을 기용하여 반군에 맞설 준비를 하였다. 또한, 수사 최호(崔湖) 등이 군사를 이끌고 홍주성으로 들어와 수성을 위한 전열을 갖추었다. 이와 동시에 충청병사 이시언(李時彦) 역시 온양에서 홍주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예산 무한산성(無限山城)에 주둔하였고, 어사 이시발(李時發)은 유구, 중군 이간(李侃)은 청양에 포진하면서 반란군을 압박하였다.

이러한 관군의 대처에 이몽학은 홍주성 점령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8월 11일 새벽 덕산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도망자가 속출하였고, 전주판관 윤계(尹誡)가 밤중에 적진에 들어가 이몽학을 살해하는 자는 큰 상을 내리겠다면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결국 반란군 중 일부가 이몽학을 살해하기 위하여 이몽학의 군막으로 난입하였고, 김경창·임억명 등이 이몽학을 참살하면서 이몽학의 반란은 끝이 나고 말았다. 이몽학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였던 한현은 반란군 수천 명을 이끌고 홍주에 주둔하였으나, 홍주목사 홍가신에게 패한 뒤 도주하다가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결과]

관군에게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된 반란군 중 33명이 처형되었고, 외방에서도 100여 명의 가담자가 처형되었다. 이몽학과 한현의 친인척들은 각처로 유배되었으며, 반란이 처음 발생한 홍산현은 혁파되었다. 반란의 여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덕령(金德齡)·최담령(崔聃齡)·곽재우(郭再祐) 등이 반군과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당하였고, 김덕령과 최담령은 혹독한 심문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반란을 토벌한 홍가신·박명현·최호·임득의·신경행(辛景行) 등은 1604년(선조 37) 청난공신(淸難功臣)에 책록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몽학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임진왜란을 통하여 드러난 사회적 모순, 민심의 이반 현상을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충청도 지역에서 반란군이 승승장구하였던 것은 당시의 충청도 지역 민심이 어떠하였는지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현대에 들어서는 이몽학의 난을 재평가하는 콘텐츠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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