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14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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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송석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표윤명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9년 - 「베틀바위」 예산문화원에서 발간한 『예산의 설화』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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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숯골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송석리 |
관련 지명 | 베틀바위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송석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새색시|신랑|돌쇠|순분 |
모티프 유형 | 유적 유래담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송석리에 전해지고 있는 베틀바위와 관련한 설화.
[개설]
「베틀바위」는 예산군 대술면 송석리에 있는 돌무덤 북쪽으로 숯골이라는 마을과 베틀바위가 있다. 숯골 마을과 베틀바위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한 젊은이의 죽음으로 목숨을 건진 새색시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베틀바위」는 1999년 예산문화원에서 발간한 『예산의 설화』에 실려 있다.
[내용]
임진왜란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한 젊은 부부가 애끓는 이별을 하고 있었다. 막 상투를 틀어 올린 열여덟 살의 새신랑이 의병에 참가하려고 길을 떠나는 중이었던 것이다. 새신부는 떠나는 남편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 새색시는 신랑의 당부대로 부모님과 식구들을 깊은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매일 아침마다 마을이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베틀바위로 나왔다. 그러고는 하인인 돌쇠와 순분이, 마을 사람 몇몇과 함께 베틀바위 옆 큰 굴에서 망을 보며 지냈다.
경황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인정 많은 새색시는 이웃들에게까지 식량을 나누어 주곤 하였다. 며칠 못 가서 식량이 떨어지고 말았다. 돌쇠는 주인의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숯을 굽기 시작하였고, 돌쇠의 고생이 마음 아팠던 새색시는 베틀을 옮겨다 베를 짜기 시작하였다. 산중에 함께 머물던 마을 사람들은 왜구가 가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 깊은 산속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새색시는 베틀바위 곁에서 신랑의 소식을 기다렸다.
돌쇠는 숯을 구워 청양과 유구장까지 다니며 식량을 구해 왔고, 순분이는 젊은 여주인이 베 짜기로 시름을 달래고 있는 것을 잘 아는지라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로 내려가 목화를 구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목화를 구하기 위하여 예산에 들렀던 순분이가 노략질을 하고 있던 왜구에게 발각되어 그만 원통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순분이의 시신이 하천 변에 버려져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돌쇠와 새색시는 한밤중에 마을로 내려가 순분이의 시신을 거두어서 언덕에 정성껏 묻어 주었다.
순분이의 죽음으로 말동무도 없어진 새색시는 오직 베 짜기에만 매달려 가며 남편의 소식을 학수고대하였다. 돌쇠는 여주인이 가여워 산속으로 들어가 식구들과 함께 지낼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새색시는 듣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구장으로 숯을 팔러 갔던 돌쇠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의병으로 싸움터에 나갔던 주인이 황해도에서 왜구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이야기를 전해 준 사람은 함께 의병에 참가하였던 주인의 친구였다. 곁에서 직접 죽음을 지켜보았다면서 친구는 눈물까지 흘렸다. 숯 지게도 내팽개치고 단숨에 베틀바위로 올라온 돌쇠는 새색시에게 소식을 전하였고, 베를 짜던 새색시는 남편의 소식을 듣고 그대로 혼절하여 베틀 위로 엎어졌다. 새색시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결을 하려고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맸지만 다행히 돌쇠가 일찍 발견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새색시는 자결할 방법만을 찾았다. 돌쇠는 잠시도 새색시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던 새색시는 소식을 전해 준 남편의 친구를 만나 보기로 하였다. 아직 왜구가 물러가지 않아서 위험한 일이었으나 돌쇠는 기꺼이 새색시를 모시고 유구장으로 내려가 친구를 찾아 다시 만나게 해 주었다. 남편의 친구는 침통한 어조로 새색시에게 친구가 어떻게 싸우다 죽었으며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상세히 전해 주었다. 혹여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산을 내려왔던 새색시는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그러고는 옛 집을 한번 돌아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새색시는 집으로 돌아오던 중 그만 약탈을 일삼고 있던 왜구들에게 발각이 되고 말았다. 돌쇠는 새색시를 부축한 채 죽을힘을 다해 뛰었지만 왜구와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돌쇠는 새색시를 산속으로 도망치게 하고는 돌과 몽둥이를 든 채 왜구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칼을 들고 무장을 한 왜구들과는 처음부터 상대도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돌쇠는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릴 때까지 왜구들과 맞서 싸웠다. 돌쇠의 용감한 행동에 감탄한 왜구들도 더 이상 새색시를 쫓지 않았다. 새색시는 먼 곳에서 돌쇠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어떻게 도와줄 수도 없는지라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가 왜구들이 사라진 다음에야 산을 내려가 시신을 수습하여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전쟁이 끝나자 새색시는 황해도까지 찾아가 남편의 묘를 찾아 뼈를 잘 수습하여 고향 땅 베틀바위 아래에 고이 묻었다.
나라의 비운에 남편을 잃고, 자기를 돌봐주던 돌쇠마저 잃은 새색시는 늙어 죽을 때까지 소복을 입고 살았으며, 매년 남편의 산소와 돌쇠의 묘소에 똑같이 제사를 지내며 추모하였다고 한다. 송석리에는 지금도 베틀바위라는 바위가 있으며, 숯골이라는 마을도 남아 있다.
[모티프 분석]
「베틀바위」는 주인에 대한 의리와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그린 지형지물 유래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