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1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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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I Am a Siheung People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유서원 |
[정의]
경기도 시흥시의 30대부터 50대까지의 토착민과 이주민을 비교해 살펴본 시흥 시민의 삶.
[개설]
경기도 시흥시는 인천광역시, 경기 서남부 및 서해안과 인접한 도시로 서울 반경 10㎞ 내에 있다. 지형은 완만한 구릉과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의 64.4%가 개발제한구역으로 서해 바다와 저수지, 오이도, 시흥 갯골 등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시흥 오이도, 능곡동 선사 유적, 관곡지, 시흥 군자봉 성황제 등 옛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고장이자 사통팔달의 광역 교통망과 함께 대규모 도시 개발 사업이 진행 중인 생명 도시이다. 이러한 시흥시에 살고 있는 토박이 주민부터 신도시 입주민, 결혼 이주 여성, 서울이나 인근 대도시에서 집을 구하기 힘들어 시흥에 거주하게 된 사람 등 다양한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변화무쌍한 ‘젊은 도시’ 시흥]
시흥시는 전체 면적의 약 60%가 개발제한구역으로 녹지와 농지 비율이 높은 반면 대규모 산업단지를 품고 있고 신도시 개발 또한 활발하게 진행 중인 역동적인 도시다. 시흥시는 배곧, 목감, 장현, 은계 등 크게 네 개 지구의 택지 개발이 진행 중이다. 배곧과 목감은 이미 입주가 상당 부분 진행됐으며 은계는 2018년 첫 입주가 시작되고 장현은 현재 아파트 분양 및 개발이 한창이다. 이에 따라 시흥시는 2020년이 넘어가면 인구 60만 명의 대도시로 진입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시흥시의 인구를 연령대별로 보면, 2016년 기준으로 40대가 20.2%로 가장 많고, 50대 16.7%, 30대 14.9% 순이다. 경제 활동이 활발한 연령대인 30대부터 50대까지가 많은 ‘항아리형’ 인구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이 연령대는 미취학 아동부터 초·중·고등 학생 자녀를 양육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요인들이 작용해 2017년 3월 기준 시흥시의 평균 연령은 38세로 전국에서 8번째로 '젊은 도시'에 속한다. 같은 기간 전국 평균은 41.2세, 경기도 평균 연령은 39.4세이다.
2018년 9월 1일 기준으로 시흥시 인구는 총 43만 9685명인데, 이 가운데 외국인 수는 3만 3495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7.6%를 차지한다. 10년 전인 2008년 시흥시의 인구는 총 39만 2756명이고, 이 가운데 외국인은 1만 5408명이었다. 지난 10년간 시흥시 인구는 4만 6900여 명 증가했는데, 여기에서 외국인은 3배 이상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신도시 개발에 따른 내국인 유입과 함께 외국인 인구가 빠른 속도로 증가한 데는 시화국가산업단지[시흥스마트허브]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1989년 첫 입주한 국가산업단지인 시흥스마트허브에는 2015년 8월 기준 1만 1873개의 기업체가 가동 중인데, 시흥시의 외국인 인구 대다수는 시흥스마트허브가 위치한 정왕동에 거주한다.
시흥시는 부천시, 광명시, 안양시, 안산시, 인천광역시와도 접해 있고 서해에 면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흥시의 특징들은 사람들을 시흥으로 오게 하고, 또 시흥을 떠나게도 한다.
[시흥에서 태어나 시흥을 기록하는 계수동 토박이]
1962년생 최영숙은 시흥군 소래읍 계수리[지금의 시흥시 계수동]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가 경기도 김포에서 계수리로 들어와 터를 잡았고, 그녀는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나 지금껏 시흥 사람으로 살고 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과수원과 목장을 시작하였다. 최영숙은 어린 시절 집에 포도 궤짝이 쌓여 있고, 포도에 봉지 씌우는 일을 거들었던 기억을 갖고 있다. 23세에 목장에서 일하던 원태희와 결혼했고, 결혼 후 목장 일을 함께하며 1남 1녀를 키웠다. 자녀들이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최영숙은 아이들 교육을 위해 부천으로 이사해 3~4년간 거주하기도 하였다. 아이들이 등교하고 나면 계수동 목장에 와서 일을 하고 저녁이면 부천으로 돌아가곤 했다. 자녀들이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다시 시흥에서 거주했다. 1992년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목장 앞으로 지나간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목장 일을 계속 하다가 2002년 그만둬야 했다.
“우리 부부는 120마리가 넘는 젖소를 키우면서 서울우유에 납품하고 있었어요. 고속도로 개통 후에도 목장을 했는데 소들이 상태가 안 좋았어요. 우리 목장이 시흥톨게이트 자리였는데 조용한 곳에서 살던 소들이 도로 건설 과정과 개통 후의 자동차 소음, 매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유산을 하고 죽기도 하고 그러면서 안 좋아진 거죠. 힘에 부치기도 했지만 이런 상황이니 목장을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최영숙은 살던 집도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부지로 편입되면서 ‘딱지’를 받고 계수동 732번지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곳에 단독주택을 짓고 2006년 입주를 한 최영숙은 은계 택지 개발로 인해 또다시 이주를 하게 된다. 2013년의 일이다. 최영숙의 단독주택이 서 있던 곳은 현재 아파트 건립 공사가 한창이다.
“개발이 진행 중인 계수동 쪽을 지나갈 때면 어린 시절 추억이 생각나 미소 짓곤 해요. 또 한편 내가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던 집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선 걸 보면 씁쓸하기도 하죠. 그래도 그 아파트에 이사 올 분들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싶고 그렇죠.”
목장 일을 할 수 없게 된 최영숙은 지금 사진으로 시흥시를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사라져가는 마을을 찍고, 시흥이 변해 가는 모습을 담아 사진집도 발간했다. 2017년에는 인터넷신문을 창간해 시흥 소식을 전달하고 있다.
“계수동은 참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가장 아름다운 곳부터 개발하는구나 싶지요. 개발을 기점으로 직업이 바뀌고, 사는 곳이 바뀌고, 내 삶마저 달라졌지만 시흥은 내가 태어난 곳이고 목장 일을 하며 참으로 열심히 살아 온 곳이에요. 후회가 없어요. 이제는 카메라를 들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시흥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싶어요.”
[열정적인 신도시 입주민]
1981년생 김현민은 2017년 3월 목감 신도시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시흥 사람이 됐다. 네 살 연하의 아내, 4살짜리 아들과 함께 그가 어린 시절부터 30년 넘게 살던 광명시를 떠나왔다. 당초에는 광명 역세권에 아파트 분양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같은 돈으로 광명 역세권에서는 26평, 목감 신도시에서는 33평 아파트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좀 더 넓은 집에서 살고 싶었다. 강남으로 출근하는 아내는 목감에서 강남까지의 교통편이 좋지 않고, 아이 교육 환경도 좋지 않다며 목감으로의 이사를 반대하였다. 김현민 자신은 승용차로 안산시와 시흥시의 거래처를 다니며 제약회사 영업 마케팅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도로망이 좋은 시흥시가 도리어 ‘교통 좋은 곳’이지만 아내는 상황이 달랐다. 김현민은 “강남까지 가는 광역버스 노선이 생길 수 있도록 민원을 넣겠다.”며 아내를 설득하였다.
“목감은 조용하고 자연환경이 좋아요. 집 바로 앞이 공원이고 소쩍새 우는 소리도 들리죠. 집에 가면 꼭 콘도나 리조트에 온 느낌이에요. 치열하게 직장 생활하고, 집은 쉴 수 있는 곳이 돼야 한다는 게 제 신조라 만족하고 있어요.”
‘만족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김현민에게 시흥은 바꿔야 할 것이 많은 도시다. 학창 시절 학생회장 한 번 못해 봤다는 김현민은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감입주자총연합회장이 됐고, 여러 곳에 민원을 넣어 광역버스가 목감을 지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시흥의 대중교통이 무척 불편하다는 걸 알게 됐고, 현재는 더 많은 버스 회사가 시흥에서 영업할 수 있도록 주민들과 집회를 여는 등 분주하다. 입주민들과 함께 목감 신도시에 학교가 신설될 수 있도록 교육청을 찾아가고 언론에 호소해 신설이 확정됐다는 답변도 얻었다. 맞벌이하며 아이를 키우는 30대 김현민의 고민은 단연 보육 및 교육이다.
“우리 아이는 다행히 단지 내 관리동 어린이집에 들어갔지만 시흥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열악한 상황이에요. 아침에 노란 차들이 쭉 서 있는 걸 보면 다른 지역의 보육 시설로 가는 아이들도 많거든요. 시흥은 아이들이 참 많이 사는 도시잖아요. 이건 시흥한테 대단한 축복이에요. 시가 의지를 갖고 교육 행정을 펼쳐야 합니다.”
김현민은 자신의 욕심으로는 계속 시흥에 살고 싶지만 아이가 중학생이 됐을 때도 교육 환경이 지금과 같다면 아내는 '아이 교육에 더 유리한 곳'으로 이사하고 싶어 할 것 같다고 말한다.
“시흥은 산과 바다가 있고 도로망이 아주 좋은, 다 충족되는 곳이에요. 굉장한 잠재력이죠. 아이들 교육에 대한 파격적인 투자와 대중교통 문제를 해결한다면 시흥만큼 좋은 곳이 없을 것 같아요. 향후 5~10년간의 행정이 시흥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봅니다.”
[결혼 이주 여성의 울고 웃는 시흥 살이]
시흥 생활 8년차, 중국 지린성[吉林省]이 고향인 1984년생 김춘향은 2010년 시흥에 왔다. 시흥스마트허브에 근무하는 남편과 2년간의 장거리 연애 끝에 결혼하였다. 한국에 살던 김춘향의 조부모가 70여 년 전 중국으로 건너가 지린성에 정착했고, 그녀는 그곳에서 나고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무역회사에 다니던 김춘향은 모국으로 돌아와 살고 있던 조부모를 뵙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의 근무지인 정왕동 단칸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는데, 2017년 9월 배곧 신도시에 30평형 아파트를 분양 받아 입주했다. 난생처음 내 집을 장만했다는 기쁨에 이사 전날은 잠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덧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딸과 연년생으로 둘째딸을 뒀고, 막내아들은 네 살이다.
“큰아이 초등학교 입학통지서를 받고 너무 좋아서 저 혼자 울었어요. 게다가 와, 이런 분들도 있구나,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싶을 만큼 아이 친구 엄마들이 좋은 분들이에요. 저만 결혼 이주 여성이고 모두 한국 분들인데 차별한다는 느낌도 전혀 없고 자연스럽게 대해 줘요. 그 언니들 만나 같이 차도 마시고, 워킹 맘인 언니의 아이 등하교도 시켜 주고, 그러다 보면 저절로 활력이 생겨요.”
한국말이 능숙하고 성격도 적극적인 그녀의 주변에는 친구가 많다. 게다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한 후 지역 내 문화센터에서 양말 인형, 선물 포장, 떡 케이크 등 여러 프로그램의 강사로 활약하는가 하면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공동 육아 나눔터에서 시간제 근무까지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아이가 셋인데 남편 수입에만 의존할 수는 없어서 무슨 일이든 찾아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이사 오면서 받은 대출금 이자만 해도 80~90만 원에 이르니 제가 열심히 벌어서 보태야 해요. 제가 노력해야 우리 아이들이 조금 더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잖아요.”
어린아이 셋을 키우며 일을 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가끔은 펑펑 울기도 한다는 그녀. 하지만 김춘향은 이제 막 시흥 살이를 시작한 결혼 이주 여성들을 위한 봉사활동만큼은 소홀히 하지 않는다.
“시흥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시흥시건강가정·다문화지원센터] 서포터즈로 활동하면서 중국에서 온 다른 이주 여성들을 위해 통역도 하고 정보도 나누고 있어요. 돈 버는 일이 시급하긴 해도 이 봉사는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에요.”
경제적으로 조금 더 안정되고, 아이들이 학교나 사회에서 차별받지 않는 것. 결혼을 계기로 시흥 사람이 된 김춘향의 바람이다.
[살다보니 고향이 된 시흥]
『잠깐만 살다가 이사가려고 했지』는 시흥시 대야동 주민자치회가 2017년에 발간한 주민 구술 생애사 책의 제목이다. 이 제목은 시흥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미용실을 운영하며 자연스럽게 동네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듣는 김봉순의 구술이다.
“저는 여기서 몇 년만 살고 뜰 생각 했거든요. 여기 와서 살면서 되게 시골스럽다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되게 정이 많아요. 도시 같지 않고. [중략] 진짜 아닌 게 아니라 서울이나 부천에서 많이 넘어와요. 그분들이 처음에 여기 와서 되게 힘들어해요. [중략] 근데 살다보면 다들 정들어 해요. 떠나기 아쉬워하고.” [위의 책, 156~157쪽]
식당을 운영하는 국인호의 구술에도 김봉순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가진 전세금으로는 서울에서 살 수가 없었어. 서울 전세 반 가격이면 여기 와서 전세를 얻을 수가 있어서 여기에 정착을 하게 됐고. 우리도 딱 3년만 살고 갑시다 그러고 왔어. 그런데 어쩌다 보니 제2의 고향이 돼서 정착하게 됐네. [중략] 시흥은 제 청춘을 함께한 도시죠. 내 아이를 키운 도시고요. 이제 제2의 고향이에요.” [같은 책, 163, 182쪽]
서울이나 인근 대도시에서 집을 구하기 힘들어 상대적으로 집값이 싼 시흥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 그래서 몇 년만 살다가 돈을 모으면 떠나야지 했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며 이웃과 정이 들고 또 굳이 떠나지 않아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오래도록 머물게 된 사람들이 시흥 사람들이다.
1977년, 제정구(諸廷坵)와 정일우(鄭日祐)[John Vincent Daly] 신부가 서울 안양천변의 철거민들을 집단 이주시켜 복음자리마을을 만들 때도 시흥을 이주지로 선택한 이유는 서울이나 부천에 비해 싼 땅값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40년 후인 2017년, 목감 신도시 입주민인 김현민이 고향이나 다름없는 광명시를 떠나 시흥시로 오게 된 계기도 조금 더 싼 아파트 값 때문이었다. 복음자리마을에서 살던 사람들은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던 공동체 생활 때문에 가난해도 행복했다고 말한다.
“우리 철거민들 공동 유대는 형제간보다 더했어. 밤새도록 술 먹고 춤추고 놀아도 절대 싸우는 게 없어. 제정구 씨랑 신부님이 싸우도록 놔두겠어. 그렇게 좋은 시절 없었다니까. 말하자면 공동체 정신으로 살았어. 한마디로 멋졌어!” [『소래산이 품은 12마을 이야기』 105~106쪽, 심병현의 구술 가운데]
어느 도시나 살다 보면 정이 들게 마련이지만 시흥시는 도농 복합 도시 특유의 '정'과 김현민의 인터뷰에 나오는 것처럼 '자연환경이 좋아'서 떠나기 싫어지는 곳이라고 시흥 사람들은 말한다. 시흥에서 주민자치회, 동네관리소, 학습동아리, 도서관 희망씨, 사회적 경제 등의 정책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도 시민 사회의 정서와 요구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흥시가 2017년 1,000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제3회 시흥시 사회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0년 후에도 시흥에서 거주하겠다.'는 응답은 63.4%를 차지했으며 '시흥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살다 보니 고향 같은 곳'이라는 응답은 57.8%에 달했다. 시흥 사람들에게 시흥은 천천히 그러나 깊이 정이 들어 쉽게 돌아설 수 없는 도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