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16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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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Where Have the many Saltpans Gone?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양훈도 |
[정의]
1920년대부터 경기도 시흥 지역을 상징했던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의 흥망성쇠.
[개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경기도 시흥의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은 양질의 소금 산지로 각광을 받았다. 광복 후에도 전국 소금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은 시흥 지역을 상징하는 장소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천일염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도시의 팽창 욕구가 커지면서 결국 시흥 지역의 염전은 폐지되었다. 군자염전은 공장 지대로 변해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소래염전만 시흥갯골생태공원에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천일염의 탄생]
천일염은 근대의 생산품이다. 바닷물을 햇볕에 증발시켜 얻는 천일염이 등장하기 전 우리나라 전통 소금은 자염(煮鹽)이다. 전오염(煎熬鹽)이라고도 하는 자염은 염분 함량이 높은 개펄 흙을 가마솥에 넣고 끓여서 만든다. 1900년대 초반 중국 산둥성[山東城]에서 생산된 천일염이 인천항을 통해 수입되면서 천일염이 우리나라에서 널리 알려졌다.
조선의 국권을 장악한 일본 조선총독부는 천일염의 가치를 인식하고 한반도 서해안에서 천일염 염전을 대대적으로 개발할 계획을 세웠다. 소금은 식용뿐만 아니라 화약 등 무기 제조 원료이기도 하고, 공업용으로도 긴요한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드넓고 완만한 개펄에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일조량과 강우량 등 기상 조건이 좋으며 일본과 만주로 실어 내기에 적합한 지역을 찾았다.
서해안은 천일염 생산에 유리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갯벌이 광활한 데다 갯벌의 경사도가 완만해 염전 개발 비용 측면에서도 유리하였다. 조수 간만의 차도 9m에 이른다. 갯벌의 토질이 점토 40~50%, 모래 50~60%여서 모래를 다져 염전으로 만들기에 좋았다. 시흥 지역은 서해로 흘러드는 큰 강이 없어 염도가 적당한 소금을 얻는 데 적합하였다. 한여름에 비가 적고 일조 시간이 길어 날씨 조건에서도 우수하였다. 게다가 일제의 관점에서 볼 때 가까운 인천항을 통해 생산된 천일염을 일본과 만주로 실어 낼 수 있었다. 일제는 인천 주안과 평안도, 황해도 등지에 염전을 조성한 데 이어 시흥과 인천으로 눈을 돌렸다.
[군자염전의 조성]
일제는 1921년 군자염전 조성 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시흥군 군자면 앞바다의 오이도와 옥구도를 이용해 두 개의 제방을 쌓아 염전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공사는 4개 구간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제방 축조 공사는 3년 5개월에 걸친 대공사였다. 힘들여 쌓은 제방이 폭풍과 해일로 5차례나 무너져 재공사를 벌였다. 염전 조성 공사에 투입된 연인원이 60만 명에 이르렀다.
1925년 군자염전이 완공되었다. 군자염전의 규모는 575정보[약 5.7㎢]에 이르렀다. 여의도 면적의 2배 정도 되었다. 군자염전은 일제의 염전 조성 사업 제3기[1921년~1924년]에 해당되는데, 군자염전 규모는 당시 만들어진 염전 총량의 절반에 가까운 46%였다. 군자염전 조성으로 시흥의 지도가 바뀌었다. 오이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라 육지와 연결되었다.
군자염전 조성 공사에 동원된 노무자 8,000여 명 가운데는 중국 산둥성의 노무자 2,000여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 산둥성은 일찍부터 천일염 생산을 시작했으므로 평안도에 염전을 만들 때부터 중국인 염전 전문가가 참여하였다. 또한 일자리를 찾아 배를 타고 건너 온 중국인 노무자도 많았다. 평안도 지역의 염전이 조금 일찍 개발되었기 때문에 군자염전을 만들 때 평안도 출신 기술자와 노무자도 상당수 시흥으로 왔다. 수인선 군자역[지금의 지하철 4호선 정왕역] 일대에 평안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평안촌[피양촌 혹은 피앙촌]이 형성되었을 정도이다.
천일염 염전은 저지식(低地式)과 고지식(高地式)으로 분류된다. 저지식은 끌어들인 바닷물을 계단식 염전으로 차례로 흘려내려 소금을 만드는 방식이고, 고지식은 바닷물을 저수지에 가두었다가 염전으로 퍼올리는 방식이다. 고지식은 저수지 면적을 상대적으로 적게 할 수 있으므로 염전의 넓이를 더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저수지 물을 염전으로 퍼올리는 동력이 필요하였다. 군자염전은 고지식을 택해 염전을 최대한 확보하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소래염전의 조성]
소래염전은 군자염전보다 10년가량 뒤인 1934년부터 1937년 사이에 조성되었다. 소래염전의 전체 면적은 549정보[약 5.4㎢]다. 소래염전은 3개 염전으로 구성되었는데, 작게는 5개 구획으로 되어 있었다. 북쪽인 1구획은 140정보[약 1.4㎢]로 지금의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서창동·운연동에 걸쳐 있고, 2구획은 90정보[약 0.9㎢]로 지금의 시흥시 장곡동 쪽이다. 3구획은 126정보[약 1.2㎢]로 지금의 시흥시 월곶동, 4구획은 81정보[약 0.8㎢]로 시흥시 방산동, 5구획은 112정보[약 1.1㎢]로 시흥시 포동의 바닷가다. 이 가운데 지금의 시흥시에 해당되는 구획 면적은 409정보[약 4.1㎢]이다.
소래염전은 군자염전과 달리 저지식으로 만들어졌다. 저지식은 바닷물을 끌어들이는 저수지의 바닥 높이가 염전 증발지 최상단 바닥 높이보다 높다. 다시 말해 바닷물이 들어올 때 저수지에 바닷물을 가두었다가 염전의 제1증발지[난치]로 흘려보내고, 이를 제2증발지[늦태]로 보냈다가, 마지막 단계인 결정지[든물깐]에서 소금을 거두어들이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군자염전에 이어 소래염전까지 소금을 생산하면서 시흥 지역은 전국에서 질 좋은 천일염을 생산하는 고장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소금은 식민 당국의 재정 수입에 중요한 원천이었다. 일제는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을 관리하기 위해 옥구도에 경성전매지국 군자파출소를 설치하였다. 시흥시 포동과 옥구도에 염전 사택이 들어섰고, 염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옥구도 둘주리산 아래 마을 돌주리를 형성하였다.
소래염전 완공 이후 협궤열차인 수인선[경동철도]이 부설되었다. 수인선 철로는 1936년부터 1937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수인선은 수원에서 인천항이 있는 남인천까지 총연장이 52㎞였다.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을 지나가는 수인선은 소금을 인천항으로 실어 나르거나 수원을 거쳐 경기도와 강원도 등 내륙 지방으로 수송할 목적이었다.
염전 관계자들의 증언을 보면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은 뱃길 이용이 편리하였다. 결정지에서 수확한 소금은 소금창고에서 남은 물기가 빠지게 했다가 배를 통해 바닷길로 인천항으로 날랐다. 염전에서 창고로, 창고에서 배로 소금을 나르는 수단은 초기에는 등짐으로 나르거나 바퀴가 하나인 외륜 수레를 이용하였다. 대량 운반을 위해 염전에 레일을 깔고 가시렁차가 나르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가시렁차는 레일 위를 달리는 대형 트레일러와 같은 운송 수단이다. 트럭이 늘어나자 염전의 소금은 주로 도로를 통해 수송되었다.
[광복 이후의 변화]
광복 이후 일시적으로 소금 부족 현상이 벌어졌다. 이북 지역인 평안도와 황해도의 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금 값이 폭등하자 정부는 천일염 생산을 민간에도 허용하였다. 염 증산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민간 염전 6,500정보[약 64.5㎢]를 조성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시흥 지역에도 이에 따라 여러 민간 염전이 들어섰다. 소금 생산은 1955년 계획 생산량을 달성하였다. 오히려 1957년에는 소금 과잉 생산이 문제가 되었다. 민간 염전 투자가 늘어 공급이 수요를 크게 초과하게 된 것이다. 정부는 결국 1961년 전국에서 1,195만 정보[약 11만 8500㎢]의 민간 염전을 폐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아울러 소금 전매 제도를 폐지하였다. 1963년 전매 당국에 소속되어 있던 국유 염전인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은 1963년 대한염업주식회사로 넘어갔다. 1965년 당시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의 규모는 전국 염전의 절반이 훨씬 넘는 58.1%에 달하였다.
천일염 생산은 날씨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소금이 적게 생산되면 가격이 뛰지만, 소금 풍년이 들면 가격은 폭락한다. 1970년대 이래 천일염 사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소금 풍흉이 거듭되고 값싼 외국산 소금 유입이 늘면서 염전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래도 1970년대까지 전국 소금 생산량의 50~60%를 차지했던 군자염전, 소래염전, 남동염전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 남동염전의 경우 도시 개발과 산업화가 가속되면서 바다 오염으로 1980년대 문을 닫았다.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은 명맥을 유지했으나, 한창 때에 비해 염전 면적은 축소되었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후반에 각각 문을 닫게 되었다.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의 변모]
1987년 군자염전이 문을 닫았다. 시화국가산업단지[시흥스마트허브] 구역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군자염전 자리는 매립되어 공단으로 변모하였다. 575정보[약 5.7㎢]에 달했던 염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염전이 있던 자리에는 공장이 줄줄이 들어섰다. 옛 군자염전을 찍은 사진과 지금의 시화국가산업단지 사진을 비교해 보면 염전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소래염전의 경우 염전 면적이 갈수록 줄기는 했으나 명맥은 약 10년가량 더 이어졌다. 그러나 소래염전 역시 1996년 염전을 폐지하였다. 염전 자리 가운데 상당 부분의 소유권은 대한염업주식회사에서 상호를 변경한 (주)성담으로 넘어갔다. 40여 동 남아 있던 소금창고 대부분도 (주)성담의 땅이 되었다. (주)성담은 그 자리에 대중 골프장 등을 세울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주)성담은 소금창고들이 골프장 건설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2006년 6월 4일 38개 동을 불을 지르는 등의 방법으로 기습 철거하였다. 당시 소금창고들은 근대 문화유산 등록을 위한 문화재청의 실사를 받기 직전이었다. 그나마 소래염전이 있던 장곡동 일대가 시흥갯골생태공원과 습지보호 지역으로 지정된 것은 다행이었다.
소래염전 일대는 1996년 염전 폐지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 생태계의 복원력에 따라 스스로 갯벌로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다. 다양한 염생식물(鹽生植物)이 자라나고, 갯고랑을 따라 여러 어종이 서식하게 되었다. 멸종 위기종인 조류도 날아들었다. 금개구리와 맹꽁이가 사는 보기 드문 갯골 습지가 되살아난 것이다.
시흥갯골생태공원은 2015년 소래염전 자리였던 시흥시 장곡동 724-32번지 일대에 156만여㎡ 규모로 지정되었다. 시흥시는 2003년부터 폐염전 자리에 공원 조성 계획을 세웠고, 2009년 1단계 공사에 착수하였다. 공원 면적 가운데 71만㎡는 2012년 당시 국토해양부가 습지보호 지역으로 지정한 곳이다.
소래염전 자리는 우여곡절 끝에 골프장과 시흥갯골생태공원이 나란히 들어선 땅으로 대변신하였다. 군자염전에 비하면 소래염전의 자취가 그래도 흔적은 남은 셈이다. 이나마 된 것은 시흥시 시민 단체와 시민들이 (주)성담에 항의하고, 줄기차게 생태 공원화를 주장하였기에 가능하였다.
소래염전과 군자염전이 사라진 것은 근본적으로 천일염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환경오염과 도시인들의 개발 욕구도 염전의 폐지를 부추겼다고 할 수 있다. 천일염이 근대의 상품이라면, 발전을 거듭한 근대가 더욱 속도를 내면서 초기 근대 상품을 몰아낸 셈이다.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의 풍경은 1977년 개봉하였던 영화 「엄마 없는 하늘 아래」와 1981년 개봉하였던 영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