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7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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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州李氏 |
영어공식명칭 | Gyeongju Yi Clan|Gyeongju Issi |
이칭/별칭 | 월성이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배태수 |
본관 | 경주 - 경상북도 경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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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중마마을 -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삼양리 |
세거|집성지 | 내촌 -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
세거|집성지 | 어룡동 -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웅동리 |
성씨 시조 | 이알평 |
[정의]
이거명을 중시조로 하고,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경상남도 밀양시의 세거 성씨.
[개설]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시조는 신라(新羅)의 육촌(六村)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이며, 중시조는 이거명(李居明)[?~?]이다. 경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경주의 옛 이름이 월성(月城)이므로 월성이씨라고도 한다.
[연원]
이알평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 32년(유리왕 9) 유리왕(儒理王)이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성(姓)을 내려 줄 때 이씨(李氏) 성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의 계대(系代)는 실전되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적에 원대손(遠代孫)인, 알평의 36세손으로 신라 진골 출신인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世系)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후손들은 이거명을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시조의 발상지인 경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경주이씨의 세계는 이거명의 17세손[고려 말]에서 8파(派)로 대별(大別)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70여 파로 분파되었다. 8대파는 평리공파(評理公派)[파조 이인정(李仁挺)], 이암공파(怡庵公派)[파조 이관(李琯)], 익재공파(益齋公派)[파조 이제현(李齊賢)], 호군공파(護軍公派)[파조 이지정(李之正)], 국당공파(菊堂公派)[파조 이천(李蒨)], 부정공파(副正公派)[파조 이매(李邁)], 상서공파(尙書公派)[파조 이과(李薖)], 사인공파(舍人公派)[파조 이수(李蓨)] 등이다. 이 밖에 판전공파(判典公派)[파조 이강(李康+羽)], 월성군공파(月城君公派)[파조 이지수(李之秀)], 시랑공파(侍郞公派)[파조 이춘림(李春林)], 석탄공파(石灘公派)[파조 이존오(李存吾)] 등이 그에 버금간다.
[입향 경위]
고려 말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던 익재 이제현(1287~1367)의 장남 이서종(李瑞種)의 증손자로 세종 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뒤 단종 손위 때 경주 구량리에 남하한 이지대(李之帶)의 후손들이 밀양에 입향하였다. 이 중 이몽천(李夢天)이 임진왜란 때 위험을 피하고자 경주에서 산내 삼양리 중마[시례]로 입촌했고, 손자 이일봉(李逸鳳)은 남명리 내촌으로 옮겨 이곳 세거지에 사인재(思仁齋)가 있다. 임고리 발례에도 후손들이 거주한다.
또 이숙정(李淑貞)의 세 아들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곽재우 휘하에서 무공을 떨쳐 곽원갑의 『(망우동)창의록』과 곽진곤의 『용사세강록』에 이름이 나란히 실렸는데, 장남 이룡갑의 아들 이의용(李毅容)이 임진왜란 때 무안 웅동리 어룡동으로 이사하였고 야촌[들마] 세거지에 용연재(龍淵齋)가 있다. 또 이의용의 삼종손 이동석(李東碩)·이동춘(李東春) 형제는 영조 때 안강 양월리에서 무안 마흘리 가복동으로 이거하였고 복강재(福崗齋)가 있다. 셋째 아들의 후손은 초동 덕산리 외송에 산다.
이제현의 차남 이달존(李達尊)의 6세손이자 ‘청호공파’ 파조의 증손자로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눌헌 이사균[1471~1536]이 있는데, 이사균의 6세손 이산수(李山壽)가 광해군의 혼정을 피해 청도를 거쳐 상남 기산리 우곡[푹실]에 전거하였다. 마을에 용운재(龍雲齋)가 있다. 이제현의 3남 이창로(李彰路)의 12세손 이홍인(李弘仁)은 당쟁이 격심하던 1679년(숙종 5) 겨울 무안 화봉리 영안동 골짜기에 은둔처를 마련하였다.
월호당의 손자 이만걸·이후창 종형제가 산 너머 청도면 조천으로 이사하였고, 본동에 소호재(溯湖齋)와 염수정(念修亭)이 있다. 한편 이온우는 조긍섭에게 배우다가 스승 허채(許埰)가 거주하던 단장 단장리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숙종 때 율은 이성림(李成林)이 상동 신곡리 신지[새마]에 입촌하였고, 추모재(追慕齋)가 있다.
아울러 ‘상서공파’의 후손들이 밀양에 입촌하였다. 이철견의 손자 이련(李瑓)은 족손 이항복(李恒福)이 1617년(광해군 9)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자 두 아들을 데리고 천리타향인 단장 국전리 갓골에 남하하였다. 이후 이인소의 고손자 이광로(李光鲁)는 다시 이중창·이극창·이영창·이효창 네 아들과 손자들을 이끌고 상남 외산리 어은동으로 이사하였고, 춘언재(春彦齋)가 있다. 또 이철견의 9세손 이후종(李厚種)이 숙종 때 단장 국전에 입촌하였고, 국전 양지마을에 추원재(追遠齋)가 있다. 아울러 이정환(李廷焕)의 처 남원양씨 열부비가 단장 국전리 국서마을에, 이종인(李鍾仁)의 처 동래정씨 열효부비가 초동 와지리 방동 꽃새미마을 입구에 있다. 그리고 이기진(李起震)이 영조 때인 1750년 무안 마흘리에, 이규창(李圭昶)이 고종 때 부북 월산에 입거하였다.
[현황]
경주이씨는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1985년에는 29만 1121가구 121만 7280명, 2000년에는 44만 6598가구 142만 4866명, 2015년에는 139만 1867명으로 조사되었다.
[관련 유적]
밀양에서 경주이씨와 관련된 유적은 소호재(溯湖齋)[청도 조천리], 염수정(念修亭)[청도 조천리], 복강재(福崗齋)[무안 마흘리 가복동], 용연재(龍淵齋)[무안 웅동리 야촌], 추원재(追遠齋)[단장 국전리 국전], 사인재(思仁齋)[산내 남명리 내촌], 추모재(追慕齋)[상동 신곡리 새마], 춘언재(春彦齋)[상남 외산리 어은동], 용운재(龍雲齋)[상남 기산리 푹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