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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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昌會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혜린 |
출생 시기/일시 | 1872년 7월 17일 - 이창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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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이창회 대한자강회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이창회 3·1운동 관련 문서 제작 및 배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8월 4일 - 이창회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면소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9월 15일 - 이창회 신한공화국 의회정부의 명의로 「선포문」과 「통첩문」 작성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9월 28~29일 - 이창회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1월 22일 - 이창회 경성지방법원에서 대정8년제령제7호 위반, 공갈 혐의로 징역 2년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60년 10월 - 이창회 사망 |
출생지 | 경기도 수원군 음덕면 남양리[현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557 |
거주|이주지 | 경기도 음죽군 동면[현 경기도 이천시] 서곡촌리 2통 10호 |
거주|이주지 | 경기도 수원군 음덕면 수화리[현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수화리] 8통 4호 |
거주|이주지 |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56 |
거주|이주지 | 인천부 금곡리 39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자강회 회원 |
[정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부친 이명현(李明賢)과 모친 홍미시다(洪美是多)의 장남이다.
[활동 사항]
이창회(李昌會)[1872~1960]는 1872년 7월 17일 경기도 수원군 음덕면 남양리[현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557번지에서 태어났다. 경성에 있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북감리파 소속 전도사를 역임했으며, 1906년에는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10월 17일 동대문 경찰서에 피체된 사실이 있으나, 왜 체포되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예수교회(分院里耶蘇敎會)의 목사였으며, 만세운동과 관련한 문서를 제작·배포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1919년 8월 4일 면소 방면 판결을 받았다. 1924년 9월 15일 경 인천부 금곡리의 자택에서 이대정(李大鼎)과 함께 신한공화국(新韓共和國) 의회정부(議會政府)의 이름으로 주권 회복의 뜻을 담은 「선포문」과 「통첩문」을 작성하고, 1924년 9월 28일~29일 임윤배(林允培)와 김종윤(金鍾允)에게 「통첩문」을 교부하여 군자금 2,000원을 출금할 것을 요구하는 등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25년 1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대정8년제령제7호 위반, 공갈 등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60년 10월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신한공화국 의회정부 활동 및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 사실이 확인되어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