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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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光軫 |
이칭/별칭 | 자임(子任)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민정 |
[정의]
조선 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자임(子任). 증조할아버지는 김필양(金匹陽)이고, 할아버지는 김대(金臺)이다. 아버지는 김세훈(金世勳)이며, 외할아버지는 권송(權悚)이다. 형은 동지중추부사 김광철(金光轍)이다. 허균(許筠)의 외증조할아버지 동생이기도 하다.
[활동 사항]
김광진(金光軫)[1495~?]은 1526년(중종 21) 별시 을과에 급제하여 1531년(중종 26)부터 1536년(중종 31)까지 사간원 정언, 사헌부 헌납, 지평, 장령 등 언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시강관으로 있을 때는 경연을 열 것, 승려와 불교의 폐단을 없앨 것, 궁중의 법도를 엄하게 할 것 등을 간하였다. 1538년(중종 33) 진주 목사로 부임하여 “정사(政事)에 부지런하고 민폐를 없애는 데 힘썼으므로 위엄과 은택이 함께 드러나 관리들은 위엄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은혜롭게 생각한다.”는 평을 들었다. 이후 제포 첨사 등 줄곧 외관직을 역임하였다.
1544년(중종 39) 양주 목사에 부임했을 때는 “벼슬살이를 직책대로 하고 백성들의 부역을 균등하게 하였다.”는 경기 감사의 보고에 따라 파주 목사와 함께 향표리(鄕表裏) 1습(襲)을 하사 받고 1품계를 가자(加資) 받았다. 그러나 김광진의 가자에 대해 지나친 포상이라는 비판이 일고 이듬해까지 조정 내에서 논란거리가 되었다. 결국 1546년(명종 1) “양주 목사 김광진은 구황(救荒)을 잘하여 백성들이 그의 은혜에 감사해 하니 가자하여 주고 그대로 유임시킴으로써 나머지 수령들을 권면하라.”는 명종의 최종 처분이 내려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548년(명종 3)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 1549년(명종 4) 청홍도 관찰사, 1551년(명종 6) 전주 부윤, 1553년(명종 8) 함경도 관찰사, 1557년(명종 12) 경상도 관찰사 등의 외관직을 역임하였다. “일에 임하기를 부지런하고 조심스럽게 하여 민폐 제거하기를 힘쓰므로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나타나,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사모하게 되었다.”, “군(郡)을 잘 다스려 가는 데마다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는 칭송을 받았던 데서도 알 수 있듯 지방관으로서 치적을 많이 쌓아 명성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