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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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興厚 |
영어공식명칭 | Choe Heunghu |
이칭/별칭 | 재숙(載叔),긍와(兢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인진 |
출생 시기/일시 | 1717년 2월 9일 - 최흥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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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99년 1월 6일 - 최흥후 사망 |
출생지 | 최흥후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외가|처가 | 최흥후 외가 - 대구광역시 북구 |
외가|처가 | 최흥우 처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하곡리 |
묘소|단소 | 최흥후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
성격 | 선비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정의]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출신 선비.
[가계]
최흥후(崔興厚)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는 재숙(載叔), 호는 긍와(兢窩)이다. 최흥후는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병조판서에 오른 뒤 광정(匡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최단(崔鄲)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郎)을 지낸 최경함(崔慶涵)이고, 할아버지는 감찰(監察)을 지낸 최수학(崔壽學)이며, 아버지는 통덕랑을 지낸 최정석(崔鼎錫)이다. 어머니는 진사 조숭(趙崈)의 딸인 함안조씨(咸安趙氏)이다. 백불암 최흥원(崔興遠)의 아우이다. 부인은 첨지중추부사 정엽(鄭燁)의 딸인 오천정씨(烏川鄭氏)로, 사자(嗣子)[대(代)를 잇는 아들] 최우진(崔宇鎭)을 두었다.
[활동 사항]
최흥후는 효성이 지극하고, 형 최흥원을 잘 섬겼으며, 모습은 깨끗하고 단정하였다. 친구를 사귀는 데는 신의를 중시하였다. 최효술(崔孝述)이 지은 「종증조 긍와공유사(從曾祖 兢窩公遺事)」에 따르면 “연세가 팔십 세 고령이 되어서도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며, 일어나서는 반드시 의관을 갖추었고 앉을 때 비스듬히 기대지 않았으며, 단정하게 앉아서 『소학』을 암송하였다.”고 하였다. ‘긍와(兢窩)’라는 호는 노우(魯宇) 정충필(鄭忠弼)이 지었다.
[묘소]
최흥후의 묘소는 지묘동(智竗洞)[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의 왕산(王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