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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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在汶 |
영어공식명칭 | Lee Jaemo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정원 |
[정의]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
[개설]
이재문(李在汶)[1934~1981]은 1934년 7월 9일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에서 태어났다. 1953년 성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4년 3월 4일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1958년 2월 졸업하였다.
[활동 사항]
이재문은 1954년 3월 4일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정치과에 입학 4학년 재학 중인 1957년 4월 『영남일보』 견습 기자로 근무하였다. 1958년 2월 경북대학교 졸업 후 1959년 1월 9일 『대구일보』 정치부 기자로 전직하였다. 1960년 5월 『대구일보』의 노사분쟁으로 자진 휴산함에 따라 1961년 2월 15일 창간된 『민족일보』에 입사하였으나, 5·16쿠데타로 『민족일보』가 폐간되어 직장을 잃었다. 1962년 4월 5일 국가건설대에 입대하여 11월 30일 일병으로 제대하였다. 이후 『영남일보』, 『매일신문』 등의 기자로 근무하던 중 1964년 8월 1차 인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재문은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971년 대선 기간에는 야당 후보 지지와 공명선거운동을 대중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두 번째로 민주수호경북협의회를 서도원 등과 함께 결성하였다. 1974년 4월 인혁당재건위사건에 연루되어 전국에 지명수배되었다. 수배기간 동안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반독재반유신운동을 위한 지하조직운동을 전개하였다.
1979년 10월 4일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체포·구속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60여 일간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근안 등으로부터 고문 등의 가혹 행위를 당하였다. 2006년 3월, 노무현 정권에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 관련자 29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을 지냈던 이재문·신향식·이해경에 대하여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 결정을 보류하고 추후 심의를 거쳐 최종 결정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아직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승인받지 못하였다.
이재문은 1980년 12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서대문교도소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1981년 11월 22일 사망하였다.
[묘소]
이재문의 묘소는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2006년 4·9인혁재단이 창립된 이후 매년 4월 9일을 전후하여 희생자를 기리는 ‘4·9 통일 열사 추모식’에서 인혁당재건위사건 희생자들과 함께 추모하고 있다.
2019년 10월 13일 마석 모란공원 이재문 묘역에서 남민전 동지회, 양심수후원회에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관련 희생자 추모식을 거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