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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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書堂- |
영어공식명칭 | Seodang Village |
이칭/별칭 | 고시촌,도장골,대구 신림동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봉숙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9년 - 서당마을 취락구조개선사업의 하나로 22가구의 양옥주택단지를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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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마을 -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 | |
성격 | 자연 마을 |
가구수 | 20여 가구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에 있는 자연 마을.
[개설]
백안동은 대구부 해북촌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백안동이 되어 달성군 공산면에 편입되었다. 1957년 대구시에 편입, 1981년 대구직할시 동구 백안동, 1995년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이 되었다. 마을 형상이 배 모양 같다 하여 배안이라 하다 마을호수가 100호 이상 되자 100호 모두가 편안함을 기원하기 위해 백안으로 불려졌다. 갈미·묘실·숲골·아래갈미재·고시촌[서당]·상갈곡[웃갈미]·모곡진[목과정] 등의 자연마을과 십입골·완정 등의 골짜기가 있다.
[명칭 유래]
서당마을은 공산초등학교에서 동남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 뒤쪽에 조선시대 서당터가 발견되면서 서당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마을은 옛부터 명당(名堂) 지역으로 알려져 많은 무당과 소원을 비는 사람들에게 도장(道場)골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조용하고 깨끗해서 고시(高試)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처음으로 배씨(裵氏) 집에서 고시 공부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숙을 시작하여 많은 합격생이 나왔고 그 일대에 하숙생이 늘어나면서 고시촌 또는 대구의 신림동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서당마을에는 1979년 취락구조개선사업의 하나로 22가구의 양옥주택단지를 조성했다. 당시만 해도 보기 힘든 가구당 330㎡ 정도 규모의 신식 주택으로 만들어졌기에 사람들은 이곳을 새마을[新村]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990년 초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고시촌이었다. 22가구 중에서 고시 학생이 있는 가구는 17가구였다. 각 집마다 방을 몇 개씩 마련하여 3~10명 정도의 고시생들이 머물렀다. 실제 마을 건물을 보면 옥탑방이 많이 보인다. 이미 고시에 합격한 인원이 약 50명 정도로 1980년에 고시 공부하는 학생이 제일 많았다고 한다. 마을은 2000년 이후부터 요양 장소로 급부상했다. 현재 고시촌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요양을 위한 황토방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며 마을의 전체 모습은 힐링마을로 변신하고 있다.
[자연환경]
마을은 팔공산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 풍성한 소나무숲으로 둘러 쌓여있다.
[현황]
서당마을은 팔공산이 지닌 치유의 힘과 팔공산 갓바위[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에서 구원해 주는 약사여래불]의 간절함에 의존해 힐링 빌리지, 힐링 로드로 조성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서당마을 백림사’라고 적힌 비석과 ‘하동정씨(河東鄭氏) 도선산(都先山) 청백제(淸白齊) 입구’라고 적힌 비석이 있다. 서당마을 뒷쪽에 있는 묘실마을에는 조선 세조 때 문신으로 하원군(河原君)에 봉해진 문절공(文節公) 좌찬성(左贊成) 정수충(鄭守忠)[1401~1496] 묘역과 신도비가 있다. 서당마을은 팔공산 올레길 1코스 시작점이기도 하며 부근에 방짜유기박물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