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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까지 흘리면서 뭣 하러 하나 후회-지남기 선생에게 여성 노작요를 배운 전순례 여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E020303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기

여성 노작요가 생긴 것은 1973년이다. 그해 10월 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가 청주에서 열렸는데, 전년도 대통령상 수상팀이 식전 행사로 공연을 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팀의 구성이었다. 1972년에는 마수리 농요팀을 중심으로 국악협회팀과 영동여고팀이 하나의 단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지남기 선생은 마을의 여자들을 중심으로 여성 노작요팀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녀 주민들로만 구성된 50명 정도의 마수리 농요팀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부녀자로 이루어진 여성 노작요팀은 지남기 선생으로부터 긴 방아, 중거리 방아, 자진 방아를 배웠다. 그리고 그중에서 노래를 잘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소리를 하도록 했고, 다른 사람들은 뒷소리 즉 후렴을 따라하도록 했다. 이때 발탁된 사람이 전순례[1940~ ] 씨와 유음천 씨이다.

전순례 씨는 1960년 제천군 덕산면 수산리에서 이곳 마수리 길병서[1938~ ] 씨에게 시집을 와 농사(논농사와 과수 재배)를 지으며 5남매(2녀 3남)를 두었다. 1973년 마수리 농요의 여성 노작요 선소리를 맡게 된 전순례 씨는 유음천 씨와 함께 지남기 선생으로부터 노래를 배우기 시작한다. 사실 음악을 듣기만 했지 해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배우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가사는 몇 번 들으면 외울 수가 있었는데 가락이 문제였다. 전순례 씨는 “그 아저씨가 하는 소릴 듣고 따라하는 방식이었어요. 목구녕에서 나오는 대로 따라 불렀는데 그게 마음이 안 들었는가 봐요. 그러면 깽과리채를 들고 ‘아 그것도 못 하느냐고’ 눈물이 날 정도로 야단을 쳐. 힘들게 배우는데 못한다고 야단을 치니 눈물이 막 나와.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뭣 하러 하나 후회도 많이 했지요” 라면서 과거를 회상하였다. 그렇지만 전순례 씨는 그렇게 설움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선소리를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순례 씨는 지남기 선생의 타고난 열정과 천재적인 음악성을 인정했다. “그 양반 목소리는 아무도 못 따러 가요. 타고난 분이지요. 농요에 대한 열성도 대단했어요. 몸이 불편해서 누워있다가도 행사만 있으면 기운이 나서 농요에 전념하는 분이니까. 아주 기가 막힌 분이었어요”라 하였다.

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여성 노작요가 자꾸 바뀌는 것이었다. 지남기 선생은 자신이 보고 듣고 배운 것을 토대로 장소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바꾸는 것이었지만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선소리는 이제 몇 번 들으문 오여져. 그런데 번번히 바뀌는 바람에 힘들었지. 그 아저씨가 하는 소리는 책을 보고 하는 것도 아니고 곡을 듣고 하는 것도 아니구. 여기서 들은걸 갖다 붙여 하날 만들구 저기서 들은걸 갖다 붙여 또 하날 만들구 하는 식이지. 만들어 하는 분은 재미있고 좋았겠지만 배우는 우리들은 말도 못하게 힘들었어. 아저씨는 음정 박자에 맞춰 노래가 자연스럽게 나오거든. 그걸 어떻게 금방 따러해”라 하였다. 이렇게 바뀐 것을 다시 익히려면 또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고 한다고 한다. 정말로 고생스럽고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그래서 더 틀리고 더 혼이 났을지도 모른다. 또 남성들이 부르는 농요가 오르내림이 있고 크고 화통하다면, 여성 노작요는 가늘고 길면서 늘어지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경지에 오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고생을 하며 전순례 씨와 유음천 씨가 여성 노작요의 선소리를 배워 팀을 이끌다가 1976년 유음천 씨가 청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래서 조카 며느리뻘 되는 이숙영 씨가 선소리꾼으로 들어와 함께 하게 되었다. 이들 두 사람은 1984년까지 함께 호흡을 맞췄다. 전순례 씨가 나이가 조금 더 많아 굵고 늘어지는 부분에 강점이 있다면 이숙영 씨는 상대적으로 젊어 가늘게 채는 맛이 있었다.

그래서 여성 노작요 삼부작인 긴 방아, 중거리 방아, 자진 방아에서 전순례 씨가 긴 방아에, 이숙영 씨가 자진 방아에 더 어울리는 편이었다. 긴 방아가 늘어지는 소리로 청승맞게 푸념하는 것이라면, 자진 방아는 재미있게 빨리빨리 사설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긴 방아가 고달픈 시집살이 얘기로 눈물을 자아내지만, 자진 방아는 맺고 끊는 맛이 있어 재미가 있다.

여성 노작요는 처음에 노래만 했는데 차츰 절구와 방아 등 장비와 기구를 도입하면서 종합예술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때 여성들 모두는 절구질, 키질, 디딜방아, 연자방아, 비질 등 연기도 배웠다. 물론 중년층에서는 이들 연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젊은 시절 정말 이런 기구들을 사용해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 여성 노작요는 짧으면 20분 길면 30분 정도 진행된다. 그리고 여성 노작요만 단독으로 이루어질 경우 40분 내지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전순례 씨에게 이들 노래 중 어느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느냐고 불어보니 바로 ‘긴 방아’의 첫 대목이라고 대답한다. 어려운 시절 이런 저런 일을 다 겪고 사신 어르신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생했을까 하는 생각에서 가슴이 뭉클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뜻이 깊은 노래라고 말한다.

덜커덩 덜커덩 찧는 방아 언제나 다 찧고 놀아나 볼까

덜커덩 덜커덩 찧는 방아 언제나 다 찧고 놀아나 볼까

일락은 서산에 해 떨어지니 월출은 동녘에 달 솟아 온다

덜커덩 덜커덩 찧는 방아 언제나 다 찧고 놀아나 볼까

고추나 당초가 맵다 한들우리네 이 살림만 못하리라

덜커덩 덜커덩 찧는 방아 언제나 다 찧고 놀아나 볼까

시어머니 잔소린 설비상 같고낭군님 잔소린 양꿀맛 같다

덜커덩 덜커덩 찧는 방아 언제나 다 찧고 놀아나 볼까

바느질품 방아품 다 팔아서알뜰이 살뜰이 잘 살아 보세

덜커덩 덜커덩 찧는 방아 언제나 다 찧고 놀아나 볼까

덜커덩 덜커덩 찧은 쌀은 부모님 봉양을 하여나 보세

덜커덩 덜커덩 찧는 방아 언제나 다 찧고 놀아나 볼까

우리가 살며는 천만년 사나늙기 전 젊어서 놀아나 보세

덜커덩 덜커덩 찧는 방아 언제나 다 찧고 놀아나 볼까

넘어가요 넘어가요 넘어를 가요 중거리 방아로 넘어를 가요

전순례 씨는 지금 마수리 농요가 과거에 비해 축소된데 대해 아쉬움을 표현한다. 1972년 대통령상 수상 후 축제 때 공연을 나갈 경우 농요뿐 아니라 농악놀이까지 겸해 그 규모가 대단했다고 한다. 무동태우기와 복구돌리기까지 있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말한다. 복구돌리기란 북을 치면서 상모를 돌리는 것을 말한다. 마수리 농요와 농악놀이는 지남기 선생이 중풍에 걸린 1995년부터 규모가 작아졌고, 이때부터는 농요가 중심이 되는 연희 형태로 조금씩 변해갔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여성 노작요에 중거리 방아가 사라진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 중거리 방아는 방아를 찧어 부모와 자식 그리고 나라님을 봉양하자는 내용으로 가락에 있어서도 느린 긴 방아와 빠른 자진 방아를 이어주는 구실을 한다. 이소라 전문위원이 채보한 가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덜커덩 덜커덩 잘도 찧는다 어허유아 방아요

덜커덩 덜커덩 잘도 찧는다 어허유아 방아요

교민화식한 연후에 농사 밖에 또 있느냐

덜커덩 덜커덩 잘도 찧는다 어허유아 방아요

춘하추동 사시순환 우리 농부들이 아닐세

덜커덩 덜커덩 잘도 찧는다 어허유아 방아요

신농씨의 복덕으로 일년 농사를 지었으니

덜커덩 덜커덩 잘도 찧는다 어허유아 방아요

우리 부녀가 힘을 합해 이 방아를 찧어보세

덜커덩 덜커덩 잘도 찧는다 어허유아 방아요

인생 백년은 초로몽인데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덜커덩 덜커덩 잘도 찧는다 어허유아 방아요

넘어가요 넘어가요 자진방아로 넘어가요

전순례 씨는 1983년까지 이숙영 씨와 함께 이러한 여성 노작요 선소리(메김소리)를 불렀다. 그러다가 힘에 부치기도 하고 지남기 선생에게 혼나는 것도 싫어 선소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동안은 이숙영 씨 혼자 선소리를 했다. 그러다가 1985년 이숙영 씨가 서울로 이사를 갔고, 좀 더 젊은 세대인 최종남 씨와 변준수 씨에게로 선소리가 전수되었다.

[정보제공]

  • •  전순례(여, 69세, 마수리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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