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E020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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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상기 |
지남기 선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박기서[1932~ ] 씨이다. 1953년부터 지남기 선생과 친교를 맺었으며 1960년대 후반에는 지남기 선생과 함께 마수리 농요를 복원하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72년에는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지남기 선생의 메김 소리를 받기도 하고 후렴구를 부르기도 하면서 마수리 농요를 전국적인 무형문화재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마수리 농요를 알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약 20년 동안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공연도 하고 발표도 하고 시연도 하면서 노력한 결과 1994년 12월 30일 마수리 농요가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문제는 1995년에 발생했다. 지남기 선생이 중풍으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이에 박기서 씨는 박재석 씨를 마수리 농요 전수자로 지정한 후 마수리 농요를 계속 이끌어 나간다. 박기서 씨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마수리 농요보존회를 결성하고 그 회장을 맡아 2001년 12월까지 마수리 농요를 보존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1월 달에 열린 마수리 농요보존회 정기 총회에서 유진형 씨가 새로운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2007년 1월에는 박홍서 씨가 마수리 농요보존회 회장이 되었다. 마수리 농요는 현재 기능보유자인 박재석 씨와 보존회장인 박홍서 씨를 중심으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박기서 씨에 따르면 지남기 선생이 마수리에 들어온 해는 1953년으로 6·25사변이 끝난 직후였다. 그는 마제 부락에서 가장 부유한 박태준 씨댁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했고, 그때 박기서 씨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박기서 씨가 말씀하셨다.
“아 그때 박태준 씨네 사랑방에 모여 이러쿵저러쿵 얘기도 나누고 꼴전 내기도 하면서 놀았지. 아 그런데 지기선이, 노래에 타고난 소질이 있어. 그 사람 특징이 들으문 들은대루 보문 본대루 옮기는 거여.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여”
이에 필자는 지기선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박기서 씨는 지기선이 지남기 선생의 어릴 적 이름으로 사람들은 그를 통상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한자로는 터 기(基) 자에 먼저 선(先) 자를 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기(南基)는 호적상의 이름이 된다.
이듬해 농번기가 되어 들에 가서 일을 하는데 지남기 선생이 동네 사람들 앞에서 당돌하게시리 “나도 노래 한 번 메기면 어떻겠느냐?” 하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에 사람들이 노래를 시켰는데 청이 어찌나 좋은지 모두들 “그 정도면 됐다” 하고 인정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힘 하나 안 들이고 농부들의 흥을 돋구는 능력이 있어” 큰 환영을 받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시 마수리 지역에 부잣집이 많지 않아 논매기 소리를 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또 가까운 가엽산(迦葉山)에 나무 하러 가면서도 그의 노래를 들었는데 노래가 참 좋았다는 것이다. 또 기억력도 좋아서 긴 사설도 거침없이 했다고 박기서 씨는 증언한다. 그래서 그런 노랠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으니 젊어서 잠깐 안성 남사당패를 따라다닌 적이 있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런 그의 실력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된 것은 1969년도였다고 한다.
당시 신덕저수지(일명 용원저수지) 아래 지역에 대한 경지정리를 하고 있었다. 주덕면 제내리와 장록리 지역에서 경지정리사업을 할 때 마제에 살고 있던 지남기 박태엽 김인호 씨 등이 그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노은 방면에서 택시를 타고 가방을 든 사람들이 다가오더니 말을 건네더라는 것이다. 지남기와 동네사람들에게 곡창지대인 이곳 농촌에서도 농사일을 할 때 부르던 농부가가 있다면 불러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지남기 씨가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연습도 없이 농사지을 때 부르던 농요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사람이 “훌륭한 농요군요” 하면서 자신이 서울에 있는 KBS방송국의 권오성이라고 소개하더라는 것이다. 잠시 후 그는 막걸리와 참을 사들고 와서는 “고대는 시장하셔서 잘 안 된 것 같은데 이거 드시고 한 번 더 노래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그들은 함께 농요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참 잘들 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걸 취재하러 다닙니다” 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노래를 하다 보니 주어진 일을 다 하지 못해 노임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불평하는 소릴 들었다고 박기서 씨는 전한다. 당시 노임은 현금이 아니고 밀가루 20~30㎏(1포대 또는 1포대 반)짜리 현물이었는데 아마 그것을 가지고 오지 못했던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노래는 별로 돈이 안 되는 모양이다. 그렇게 하고는 본업인 농사에 충실하며 농요를 부르는 정도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1971년이 되어 충북도 공보실에서 공무원이 나와 지남기 씨를 찾으면서 마수리 농요가 본격적으로 발굴되기에 이른다. 아마 도에서 KBS에서 방송된 소리를 듣고 민속예술 경연대회 출전할 농요로 생각한 것 같았다. 1972년 봄 도에는 지남기 씨를 불러 마수리 농요를 녹음하기에 이른다. 그해 가을 다시 지남기 씨는 도에 다시 불려가 또 다시 녹음을 하였다. 얼마 후 도청 관계자로부터 “아주 훌륭한 농요이니 농요팀을 구성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이장 책임 하에 지남기를 중심으로 10여 명이 농요 소리팀을 구성하여 연습을 했다.
1972년 10월 15일 마수리 농요팀은 도청으로 불려갔고 10월 22일 대전에서 열리는 제13회 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청주의 국악협회(회장:윤영남) 회원 20명과 함께 영동으로 가 영동여고 학생 70명과 함께 팀을 구성하였고, ‘탄금대 방아타령’이라는 이름으로 일주일간 함께 연습을 했다. 10월 22일 대전에서 탄금대 방아타령 공연은 훌륭하게 이루어졌고 호응도 아주 좋았다. 그 결과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탄금대 방아타령 즉 마수리 농요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마수리 농요는 이제 충북의 대표적인 농요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농요가 된 것이다. 그리고 곳곳에서 공연해 달라는 요청이 줄을 잇게 된다. 이때부터 지남기의 노래 인생은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1972년 12월 10일 동양방송에서 마수리 농요 공연모습을 녹화 방송하였는데 이를 통해 지남기 씨는 더 유명해졌다. 타고난 재주꾼인 그는 이때부터 농요에 새로운 사설들을 발굴하여 넣음으로써 마수리 농요가 좀 더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국악협회 회원들이 부른 방아타령이 충청도 노래가 아니고 전라도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래서 지남기 씨에게 물었더니 그 자리에서 우리 충청도 방아타령을 해 대더라는 것이다. 남한강변에 있는 이천 여주, 충주 단양, 영월 정선 것이 비슷하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것을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마수리 농요에 여성 노작요를 도입하게 되었고, 마수리 농요가 남자들의 농요와 여자들의 노작요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973년 10월에는 14회 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전 대회 우승팀으로 초청되어 식전 행사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3회 우륵문화제에도 참여하게 된다. 이제 마수리 농요는 매년 문화행사에 초정되는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행사가 꼭 가을걷이를 할 때 치러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때부터 단원들 사이에서 불만을 얘기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남기 씨와 박기서 씨는 “문화라는 게 다 그런 거여. 조금 참아 보자.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라는 말로 단원들을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제기된 또 한 가지의 문제는 마수리 농요의 사설이 자꾸 바뀌는 것이었다. 원래 민요라는 게 즉흥적인 것이어서 장소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지남기 씨의 사설은 지나치게 바뀌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지남기 씨의 풍부한 경험과 음악적 능력에서 나온 결과였다. 한 마디로 지남기 선생의 가사와 사설은 무궁무진했다. 박기서 씨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장과 기능자가 상의를 했다. 결국 원본을 작성하고 고정시켜 더 이상 생소한 가사와 새로운 창법으로 노래 부르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1983년 8월에는 문화재 전문위원인 이소라 선생의 도움으로 마수리 농요의 가사를 정리하고 가락을 악보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1985년 10월에는 서울 국립극장 야외공연장에서 역대 민속예술 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팀들의 시연이 벌어졌는데 이때 마수리 농요는 또 한 번의 변화를 겪게 된다. 이날 공연은 이듬 김매기 노래인 ‘어화굼실 대허리야’에서 절정을 이루었는데 국악합창단이 뒷소리를 해서 그 감동이 더 컸다고 한다.
이 공연이 끝나자 문화재 전문위원이던 이보형 선생이 다가와 참 잘한다고 말하면서 “이거 말고도 옛날 고사덕담 같은 거 있지 않습니까? 그럼 더 좋을텐데” 하고 물어왔다. 그러니까 지남기 선생이 즉석에서 고사덕담을 메기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보형 선생이 “그거 좋습니다. 그걸 넣으세요” 라고 말을 했다. 이때 이후 마수리 농요에는 고사덕담이 들어가 3부작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1부가 고사덕담이고, 2부가 남성들의 농요이며, 3부가 여성들의 노작요이다.
1990년대에는 마수리 농요를 무형문화재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방아타령이 전라도 것이라는 이의가 제기되었다. 그 주장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은 1972년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의 방아타령은 국악협회 사람들에 의해 불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지남기 선생이 즉석에서 가사를 슬쩍 바꾸더라는 것이다. 지남기 선생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가사와 가락이 들어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남기 선생이 남한강 지역에서 불리던 농요를 순식간에 찾아낸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충북도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한 농요가 당초의 것이 아니니 어찌된 겁니까? 자꾸 바꾸면 보존가치가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지남기 씨와 보존회는 “마수리 농요를 더 이상 변동시키지 말자. 그대로 밀구 나가자. 이제부터 책자두 만들어 보존”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1994년 12월 30일 마수리 농요는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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