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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사람들의 쉼터였던 목계 솔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D020303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어경선

목계마을에서 남한강 건너 맞은편에 솔밭이 보인다. 언뜻 보아 200~400여 년 이상 됨직한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충주 사람들이 한 번씩은 이 숲 아래 강가에서 물놀이를 했던 기억들이 있다.

현재는 소나무 숲이 많이 줄어서 남아 있는 부분이 200~300m 밖에 안 된다. 일제강점기에도 ‘마쓰바라(松林, 松園)’라 하여 쉼터이자 놀이터였다고 한다. 현재의 규모는 원래에 비하면 1/10 밖에 안 되는 것이라고 한다. 옛날 ‘목계 솔밭’은 됫섬 맞은편, 가금면 장천리 ‘저우내마을’ 아래쪽부터 시작해서 내려와 지금의 솔밭을 지나 여우섬 맞은편까지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대단했다고 한다. 대부분이 국유림이어서 개인들이 불하(拂下)를 받아 나무를 베어내고 조금씩 밭을 일구기 시작하여 소나무 숲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현 이름은 ‘목계 솔밭’이지만 실제 행정구역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412-1번지 향천마을이기 때문에 관리는 가금면에서 하고 있다. 목계 솔밭은 1999년 12월 28일자로 충주 보호수 55호로 지정되었다.

목계 솔밭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목계나루는 내륙 하항으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목계나루는 매년 큰 화재가 발생하여 막대한 재산 피해를 입곤 하였다. 그것이 수백 년 간 전통이 되다시피 하여 화재가 나면 공포에 떨고 인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까지 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나룻배에서 내린 방갓을 쓴 두 사람이 나루터 한 구석에 앉아서 패찰을 내놓고 산천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곳의 촌로 한 사람이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그 옆으로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뉘시길래 이 냉습한 곳에 앉아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거요?” 그러자 방갓 쓴 두 사람은 마을 노인을 쳐다보더니 “이곳에 사시는지요?” 하고 나서 혹 이 마을에 화재가 잦지 않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목마른 사람이 샘을 만난 것처럼 어떻게 그 사실을 잘 아느냐며 말을 이었다. 무릇 액이 오는 것을 아는 자는 액을 쫓을 줄도 아는 법인데 그 방액은 없겠느냐고 물었다. 한 사람이 방갓을 벗고 나서 손가락으로 부흥산을 가리켰다. 저 산이 불의 정기가 강하여 이 마을 사람들은 불 속에서 물장난을 하며 살고 있는 형국인데, 더구나 이 강물은 이 산을 외면하고 흐르는 형국이니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저 산신의 비위를 거스르면 화가 닥치는 것은 정칙이라며 이 강물을 저 마을 쪽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을 노인이 몸가짐을 가다듬고 도대체 누구냐고 다그쳐 묻자 후일 알 것이라며 그곳을 떠나버렸다. 그들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모사인 두사충과 그와 같이 풍수를 공부하며 다니는 금강산의 수행승이었다고 한다. 그 노인은 방갓 쓴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동리 사람들을 재촉해서 강물을 돌리기로 했다. 온 동민들은 물론 많은 인원의 품을 사서 흙을 파다가 강 가운데다 산을 만들었다. 반년이 넘어서야 강물을 목계 쪽으로 돌리게 했고 그 산에는 소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그것이 곧 오늘날의 목계 솔밭인 것이다. 따라서 한 강물이 목계 부흥산 밑을 질러 나가므로 남한강의 수신과 부흥산의 산신이 상극이 되어 물과 불의 균형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상극되는 산신과 수신을 달래기 위해 서낭당을 지었으니 그것이 곧 지금 있는 부흥당의 시초인 것이다’

[정보제공]

  • •  윤우식(남, 목계리 주민)
  • •  윤태호(남, 75세, 목계리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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