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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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洪植 |
영어음역 | Sin Hongsi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박걸순 |
[정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35세 때에 청주북감리교회에서 미국인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1913년 서울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서 공주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17년 평양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 목사로 옮겨 재임하던 1919년 2월, 동지의 규합을 위해 평양에 온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3·1운동의 계획을 전해 들었다.
그는 곧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상경하여 기독교계 동지들과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2월 28일, 독립선언식에 참가하기 위해 다시 상경한 그는 손병희(孫秉熙)[1861~1922]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을 상의하기 위한 최종 회합에 참석하였다.
3월 1일, 그는 동지들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일제에 피체되었다. 그는 법정에서도 일제가 제시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의 허구성을 질타하며 독립에 대한 확신을 피력하였는데, 결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인천과 원주 등지에서 종교 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묘소]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