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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379
한자 烈女
영어의미역 Virtuous Woman
이칭/별칭 열부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홍숙

[정의]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켜 포상된 여자.

[개설]

대부분의 열녀들은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남편이 죽으면 수절하거나 남편을 따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 열녀들의 행적은 멀리는 순장 제도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겠으나, 그보다는 여성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식하지 않고 남성의 예속물이나 종속물로 인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즉 유교적 국가 이데올로기 아래 여성의 희생을 유도하고 그 행적을 칭송하던 문화 현상이 초래한 결과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열녀각이나 열녀비는 이 사실을 잘 말해 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미 설화의 도미 부인, 온달 설화의 평강 공주, 「치술령가」의 박제상의 아내를 열녀의 범주에 넣는 경우도 있으나, 이들의 행적은 열녀와 결이 다르다. 현존하는 열녀 기록은 주로 조선 시대에 집중되어 있다. 조선 초에 간행된 『고려사』에 ‘열녀(列女)’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때는 자신의 몸을 지키는 방편으로 여성이 자결을 했을 때를 지칭할 뿐이어서,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열녀와는 차이가 있다.

조선 시대의 열녀는 고려 말에 보급된 군신 간의 절의를 강조한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이념이 부부지간에서의 부인의 이념으로 전이되어 나타난 현상으로 짐작된다. 『정조 실록』에 보이는 고려 충신 길재에 관한 기록에서 이러한 흔적이 보인다. 여성으로 하여금 임금을 대하는 충신과 같은 이념으로 남편을 대하게 함으로써 여성이 위대해진다는 신념을 심어주어, 여성 스스로가 그 길을 택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열녀에 관한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1404년(태종 4년)이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 열녀에게 정려를 했다는 기록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남편을 따라 죽은 부인의 행적에 대해 국가가 직접 공훈(功勳)을 함으로써 그 가치를 찬양하고, 그것을 모범으로 내세워 당대 사회의 위계질서 유지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창원 지역의 열녀들도 이러한 윤리적 인식 아래서 나타났다.

[관련 기록]

조선 시대 창원 도호부 권역의 열녀는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만 해도 30명이 넘는다. 창원 도호부 권역은 지금의 마산시·창원시를 비롯한 김해시와 진해시, 그리고 양산시의 일부를 두루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창원 지역의 열녀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창원부 읍지』, 『조선 환여 승람』, 김종하의 『창원 군지』, 창원군이 펴낸 『창원 군지』, 『마산 시사』, 『창원 시사』 등에 그 행적이 간략하게 전해 온다. 『순조 실록』에는 1814년(순조 14년) 박경천의 처 배씨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고, 『창원부 읍지』에는 6명의 열녀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나머지는 『조선 환여 승람』과 김종하의 『창원 군지』에 각각 전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주민들에 의해 건립된 비문에 그 행적이 남아 있다.

[현황]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감계리 사람인 공우직의 처 이씨, 창원시 동읍 단계리에 살던 구학령의 처 강씨, 김상찬 처 이씨, 김수양의 처인 현재 창원시 명곡동 출신 이씨, 박경천의 처 창원 출신 분성 배씨, 박익천의 처 창원 출신 배씨, 현 창원시 웅남동에 살았던 손씨의 처 이씨, 윤재홍의 처 창원 출신 강씨, 장귀의 처 창원 출신 양씨, 창원시 웅남동 출신인 정주안의 처 안씨, 진정원의 처 창원 출신 정씨, 진흥은의 처 창원 출신 강씨 등의 효부가 있었다.

그리고 비록 나라에서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효행과 열행으로서 많은 이들을 감동 시킨 마산 내서의 김용연김봉선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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