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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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銕求 |
영어공식명칭 | Kang Cheolgu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민석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2월 8일 - 강철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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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7년 - 강철구 만주로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월 - 강철구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비서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4월 - 강철구 군자금 조달 목적으로 입국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6월 - 강철구 임시정부 발행 공채를 소지하고 입국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3월 31일 - 강철구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선고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11월 19일 - 강철구 일본 경찰에 체포 |
몰년 시기/일시 | 1943년 10월 21일 - 강철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강철구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출생지 | 장하리 -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
활동지 | 독립운동 - 중국 만주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비서 |
[정의]
충청남도 부여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강철구(姜鐵求)[1894~1943]는 1894년 2월 8일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하다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17년 대종교 교도로서 만주로 건너가 북간도 연길현 동불가 천영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20년 1월부터는 북로군정서 총재인 서일의 비서가 되었다. 1920년 4월 재무국장 윤정현의 명령으로 국내에 파견되었다. 강철구는 과거 홍산경찰서에 근무하며 알고 지낸 박길화에게 박길화의 친척이자 부호인 박창규, 박남규 등을 소개받아 군자금을 모금하여 만주로 돌아와 서무부장 김택(金澤)에게 전달하였다. 1922년 6월 사관연성소 확충 자금 모금을 위한 임시정부 발행 공채 3만 5000원 상당의 문서를 가지고 입국하여 함경북도 회령의 김동진, 청진의 김동순, 서울의 문용섭, 부여의 문장섭·김재설·김삼현·문경섭, 강경의 김찬형·김철수 등 여러 동지를 통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후 고향 부여에서 임시정부 활동을 소개하고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강철구는 국내 항일운동을 지속하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923년 3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1928년 만주로 가 천영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42년 11월 19일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혹독한 고문으로 1943년 10월 21일 목단강성(牧丹江省) 가목사(街木斯)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강철구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